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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9월30일 일요일 12 (제141호) 기획 친원세력을제거하고개혁정치를추진한고려제31대공민왕,홍건적의침입을두번이나받았으며,왜구의침 범으로곤욕을치렀다.그리고김용의무리들에의해흥왕사의난이일어나기도하였으며노국 공주에빠져신돈이정권을농단하는등공민왕에대한평가는의견이분분하다. 공민왕조에최영장군과함께제1순위로신돈에의해권문세족으로몰려광양으로유배를갔다가다시머리를 깎여울주의열암사(裂巖寺)로유폐되어살해당한고려문신이자무신이기도한박춘선생은흥 왕사의변으로복주로피난하는공민왕을호위하여1등공신에오르고,홍건적을물리치고개경을수복한공으 로1등공신에각각올라공신각에초상화를걸었던공민왕조의벽상공신이다. 공민왕은신돈의국정농단속에벽상공신박춘선생의죽음을모르고후에이를알고신돈을처형하는등충신 의죽음을애도하고좌시중에추증하고문정(文定)의시호를내렸다. 최근후손들은고려사를비롯한고려절요·열전등의기록을살펴보며선생에대한고증작업을통해올바른평 가를하고자노력하고있어지난2008년1월호에소개한바있으나다시한번더소개해보고자 한다. 좌상공(휘 춘)은 신라 경명왕의 장자 밀성대군 의 후예이다. 중조(中祖) 태사공(太師公) 휘 언 부(彦孚)는 고려 문종(1047년 丁亥) 때 문과에 급제하여 최충과 함께 태사(太師)를 지냈고 중서 령 문하시중 도평의사를 역임하였으며 밀성부원 군에추봉되었다. 아들을 둘 두었는데 맏이는 효신(孝臣) 차는 의신(義臣)이다. 고려 인종은 양 형제를 효의양 신(孝義兩臣) 또는 고려주석(高麗柱石)이라 부 르고 동방대성(東方大姓)이란 어필 넉자를 하사 했다. 효신(孝臣)은 과거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이 되었고 평장사로서 중국에 사신으로 갔을 때 천 자가 예로서 대우하여 치사하였고 본국에 돌아와 졸하였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라 사시하고 인종 묘에 배향하였다. 의신은 공부상서로서 종방인 양신(良臣, 彦祥의 아들), 직신(直, 彦仁의 아들) 과 더 불어 세상에서 삼언사신(三彦四臣) 이라 알려져있다. 공필(公弼)은 효신의 아들 형제(공필·공발)중 장자인데 과거에 급제하여 대장군 도검사 병부상 서를 역임하였다. 공은 문무에 재주가 겸비하여 고려 예종(1107년) 2년에 윤관과 같이 여진을 쳐 서 평정했다. 뒤에 진국공신으로 추존되었고 시 호를충열(忠烈)이라사시하였다. 육화(育和)는 공필의 아들 삼형제(육경·육화· 육권) 중 차자인데 고려 의종조에 병부상서와 동 북병마사와형부상서를지냈다. 육화의 아들은 윤공(允恭)인데 내시중(內侍 中)으로 수덕궁을 증축하였고, 시어사(侍御史) 재임시 무신정변 후 폐주복위 사건이 발생하고 이를 빌미로 수많은 문신들을 제거 할 때 이의방 에 의해 살해되었다. 이는 고려사에 전하고 그의 아들 상례(尙禮)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으로좌상공의아버지가된다. 박춘 선생의 초휘는 춘(春)으로 개휘는 춘(椿) 이다. 선생의 선조 태생지는 밀양이다. 그러나 좌 상공 박춘은 개경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아야한 다. 좌상공의 증조부 휘 육화는 급사중(給事中, 종4품)과 동북면병마부사(정3품)이고 조부 휘 윤공은 내시중과 시어사(侍御史, 종5품), 아버지 상례는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 정6품)을 지 내는등개경에서살았다. 특히 스승인 이재 박이정 선생에게 수학하였으 니당시백이재선생또한개경에있을때다. 좌상공(左相公)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 가 많았으며 6세에 이르러 스스로 독서를 즐기어 14세에 이재(彛齊) 백이정(白蓬正) 선생에게 수 학하였다. 문장과 무예를 익히어 후에 원나라에 들어가 등제(登第)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돌아와 익재 이재현(益齊 李齊賢)목은 이색 (牧隱 李穡)과 더불어 정주(程朱)의 학설(學說) 을 강론(講論)하였으며,익재 선생의 천거로 공민 왕조에 입조(入朝)하여 문신인 밀직제학을 지냈 다. 이후 계속된 홍건적의 난으로 만호(萬戶), 나 주목사, 응양군 상호군, 청주수원도병마사, 판밀 직사사(判密直司事),우시중등을지냈다. 공민왕조는 왜구와 홍건적의 침입이 빈번하여 문무를 겸비한 공(公)의 지략(智略)이 빛나기도 하였다. 1358년 4월 공민왕은 잦은 왜구의 침입을 막고 자 최영을 양광(楊廣)·전라도(全羅道) 왜관(倭 冠) 체복사(體覆使)로 박 춘을 나주목사 겸 전라 도 존무사로 삼아 왜구를 토벌토록 하였다. 이에 수많은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당시 사위 정준제 (훗날정지로개명)맞았다. 1359년(공민왕 8) 11월에 홍건적 3,000명이 압 록강을 건너와 북변을 약탈하더니 12월에 모거경 이 이끄는 4만 병력이 침입하여 의주·정주·인주· 철주 등지를 함락시켰다. 이어서 서경을 함락시 키고 용강·함종까지 진출했다. 이에 고려군은 전 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서 이듬해 정월에 2만의 병력으로 서경을 공격하여 찾고, 다음 달에 함종 의 전투에서 2만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도망가는 적을 추격, 섬멸하여 침입한 적 가운데 수백 명만 돌아갔다.2번째는 1361년 10월에 있었 다. 당시 박춘 선생은 무신으로 안우 최영,유탁,이 방실 등 40여명의 장수들과 협력하여 홍건적을 무찌르는데 앞장섰고, 1361년 10월에 이르러 홍 건적 반성·사유·관선생·주원수 등이 10여 만 명 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했다. 이들 은 서북면의 여러 성을 함락시키고 개경의 방어 선인 절령을 무너뜨리고 11월 하순에 개경을 점 령했다. 이에 공민왕이 복주(현 안동)으로 피난 할 때 호종하였고, 개경을 수복하는데 크게 공헌 했다. 1362년 8월 공민왕은 홍건적의 재침에 대비하 여 공(公)을 청주수원도병마사(淸州水原道兵馬 使)로 삼았는데, 당시 홍건적 소식이 있었고, 또 한〈원〉 황제가〈홍건적을〉협공하라는 명령을 내 려 이와 같은 임명을 하였는데, 홍건적이 궤멸되 었다는소식을듣고중지하였다. 1363년 윤 3월 15일〈흥왕사(興王寺)의 변란 때〉왕을 부축하여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을, 또 개경[京城]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각각 녹 훈하고 〈공신각의〉 벽 위에 그 초상화[圖形]를 걸고, 부모와 처는 세 등급을 뛰어 봉작(封爵)하 며,그 아들 1인에게는 7품의 관직을 주되 만약 아 들이 없으면 조카나 사위 중 1인을 8품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구사(驅史,공신 등에 배당되 었던 말단 관속)는 5인, 진배파령(眞拜把領)은 7 인으로 하였고,초입사(初入仕)를 허용하고 자손 은 음직(蔭職)으로 서용(敍用)하였으며, 토지 10 0결과노비10구를하사하였다. 1363년 5월 24일 이득춘(李得春)이 원에서 돌 아와 말하기를, “〈원〉황제가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으로 삼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원자(元 子)로 삼아, 요양(遼陽)의 군대를 출병시켜 그들 을 호송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득춘이 일찍이 강지연(姜之衍)을 따라 원에 갔을 때 덕 흥군이 자기 마음대로 호군(護軍)에 임명하였는 데, 왕이〈이득춘을〉불러 보고 무슨 벼슬이냐고 물어보자 이득춘이 사실대로 대답하였다. 왕이 즉시 그를 대호군(大護軍)에 임명하면서 말하기 를, “네가 만약 한 마음만 가지고 나를 돕는다면 재상이 되는 것도 어렵지 않으며, 만약 그렇지 않 다 면 반 드 시 빠 른 시 간 내 에 화 를 입 을 것 이 다 .” 라고 하였다. 신하들이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기 를,“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정성을 다해 사대 (事大)를 하였으며 강력한 홍건적을 두 차례나 섬멸하였으므로 그 공적이 뚜렷한데,적신(賊臣) 최유(崔濡)가 원 조정을 속여 불화를 조성하고 왕을 교체하려고 합니다. 또한 우리나라로 하여 금 군사와 민간인을 구분하여 민간인은 군량을 운반하고 군사는 출병(出兵)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미 홍순(洪淳)을 파견하여 연유를 갖추어 써 원 중서성(中書省)에 올리도록 하였으니, 잠시 동안 군대를 출동시켜 수비하면서 명확한 지시가 내려오는 것을 기다리십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감히 어쩌지 못하고, 이에 박춘 선생을 도병마사 (都兵馬使)로 삼아방어토록하였다. 1364년 1월 1일 최유(崔濡)가 원 병사 10,000명 으로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鴨綠江) 을 건너 의주(義州)를 포위하니, 도지휘사(都指 揮使) 안우경(安遇慶)이 7번 싸워 물리쳤다. 그 러나 다시 나가 전투를 벌였다가 도병마사(都兵 馬使) 홍선(洪瑄)은 포로가 되었으며, 아군은 패 전을 하여 퇴각하여 안주(安州)를 지키고 최유는 선주(宣州)로 들어가 웅거(雄據)하였다. 왕이 찬 성사(贊成事)최영(崔瑩)을도순위사(都巡慰使) 로 삼 아 정 예 병 력 을 이 끌 고 급 히 안 주 (安 州 ) 로 달려가서 모든 군대를 통합 지휘하게 하고, 또 이 성계에게 명하여 동북면(東北面)으로부터 정예 기병 1,000명을 이끌고 나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순(李珣), 도병마사(都兵 馬使) 우제(禹 )·박춘(朴椿)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합류하니, 아군이 다시 기세를 떨쳐 크게 승 리하였다. 1364년 2월 24일 서북면도원수(西北面都元帥) 경천흥(慶千興)과 도순위사(都巡慰使) 최영(崔 瑩)·안우경(安遇慶)·이순(李珣)·우제(禹 )·이 구수(李龜壽)·지용수(池龍壽)·박춘(朴椿)·홍사 우(洪師禹) 등이 개선하니, 왕이 유사(有司)에 명령하여 왕의 행차를 환영하는 의례[迎駕儀]에 따라 도성 밖에서 맞이하도록 하였으며, 백관은 국청사(國淸寺)의 남쪽 교외에서 연회를 베풀었 으며, 공(公)을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삼았 고, 1365년 3월 우시중(右市中)에 올랐다.(高麗 史節要譯4권 144P列傳649P) 그러나 1365년 5월 23일 신돈의 모함으로 광양 으로 유배를 당하고, 7월 신돈이 최영과 박춘의 가산을적몰하였다. 당시 공민왕은 노국공주에게 빠져 있어 모든 정사는 신돈에 의해 펼쳐졌다. 신돈은 자신을 신 승(神僧)이라 부르며 설법 들으러 온 여자들을 매번 간음했다. 밀직(密直) 김란(金蘭)이 자기 딸을 둘씩이나 신돈에게 준 일을 최영(崔瑩)이 책망하자 김란과 신돈은 힘을 합쳐 최영을 계림 윤(鷄林尹)으로 좌천시켜 버렸으며,최영파인 찬 성사(贊成事) 이인복, 밀직 조희고·홍사범·최맹 손 등을 파직시키고 그 자리에 김란·김보·이춘부 ·임군보·박희 등을 앉혔다. 또 찬성(贊成) 이구 수, 평리(評理) 양백익, 판밀직(判密直) 박춘, 예 성군(芮城君) 석문성, 환관인 부원군(府院君) 이 녕·김수만 등도 참소해 유배 보냈다.신돈은 그래 도 분이 안 풀렸는지 상호군(上護軍) 이득림과 순군경력(巡軍經歷) 오계남을 시켜 최영과 이구 수 등을 국문한 뒤 “두 사람이 김수만과 결탁해 왕과 신하들을 이간질하고 충신을 배척하는 등 불충한 짓을 했다”고 죄목을 날조했다.고문에 못 이긴 최영 등이 거짓자백 하자 관작을 삭탈하고 땅을 몰수했다.1366년 8월 17일(음) 신돈은 정적 을 유배시키는 것은 물론 이구수(李龜壽)의 머리 를 깎아 송광사(松廣寺)에, 김귀(金貴)를 노산사 (盧山寺)에, 박춘(朴椿)을 울주군의 열암사(裂 巖寺)에 각각 유폐했는데, 신돈(辛旽)이 얼마 뒤 에 왕안덕(王安德)과 배인길(裵仁吉) 보내 곤장 을 쳐 죽이거나 아예 바다에 수장(水葬)시키는 만행도 저질러 공(公) 또한 수장된 채 유해를 수 습하지못했다. 이후 공민왕(20년)은 문무를 겸비한 충신(忠 臣)의 아까운 죽음을 추모하여 좌시중(追 左侍 中)의 증직을 내리고 시호를 문정(謚 文定)이라 하였다. 좌상공 박춘 선생은 성리학에 매진하여 익재 이재현 선생과 함께 강론하였던 문신이었다. 그 러나 나라가 위태로울 때 무신으로 왜놈과 홍건 적을섬멸하는데도큰공헌을하였다. 그리고 그의 사위 정지 장군은 장인의 뒤를 따 라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무신으로 고려 말 남해 안 지역에 침입한 왜적을 물리치고, 쓰시마 섬 등 을 정벌하는 등 우리나라 해전사에 길이길이 남 을 만한 공으로 해군의 핵심전력인 1800t급(214 급)잠수함을‘정지함’으로이름하기도하였다. 공민왕은 1351년 왕위에 올라 원명교체라는 대 륙정세의 변동을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고려의 중 흥을 꾀하는 많은 개혁을 시도하였다.그러나 136 5년 왕비인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모 든국사를신돈에게맡기고정사를소홀히했다. 신돈은 이를 틈타 국정을 농단하고 권문세족을 제거할 명문을 찾아 온갖 음모로 충신들을 제거 하기에이른다. 박춘 선생은 강직한 성품으로 신돈의 미움을 사기에충분하여결국신돈에의해처형되었다. 이에 후손들은 뿔뿔이 흩어져 선생의 생전 자 료는 물론 사후 60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오명을 안은채살아왔다. 그것은 온라인상의 백과사전이나 경기도 가평 소재 이방실의 신도비(최근덕 撰)를 보면 ‘이방 실이 박춘에 의해 살해되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 다. 이에 대해 후손들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 사열전을 통해 선생의 자료를 수집하여 지난해 ‘한국민족대백과사전’의 오류를 바로잡았고, 이 방실 사당을 조만간 참배하여 진실을 전달할 방 침에 있어 이방실의 체포와 죽음에 대해 고려사 와고려사열전을소개해하면서마무리해본다. 【卷一百十三>列傳 卷第二十六>諸臣>안우·이 방실의 아들들[이방실의 죽음에 대한 진실 기 록]】 鏞與洪彦博·柳濯·廉悌臣·李岩·尹桓·黃裳·李 春富·金希祖稟旨, 揭榜云, “祐等不忠, 擅殺世雲. 祐已伏辜, 有能捕得培·芳實者, 超三級錄用.” 分 遣大將軍吳仁澤·御史中丞鄭之祥·萬戶朴椿·金庾 等捕之. 是日, 芳實赴行在, 至龍宮縣, 王命芳實舅 右散騎辛珣·按廉成元揆往迎. 椿至, 稱有旨, 芳實 下庭눠. 仁澤拔劒擊之,卽뺘絶,良久復蘇,踰垣走. 椿追執之, 芳實欲拔椿劒, 之祥等從後擊殺之. 得 培至基州聞變, 率數騎逃匿山陽縣先塋側. 流其弟 得齊于花山, 囚得培妻돨鞫之. 其壻直講趙云 謂 妻母曰, “直言之, 毋受苦楚.” 妻母隱忍久之乃告. 庾·椿·之祥·元揆等捕斬之, 梟首尙州. 年五十一, 觀者莫不嗟悼. 得培門生直翰林鄭夢周, 請王收屍, 爲文以祭曰, “嗚呼皇天! 我罪伊何 嗚呼皇天! 此何人哉 盖聞, 福善禍淫者, 天也, 賞善罰惡者, 人也. 天人雖殊, 其理則一. 古人有言曰, ‘天定勝人, 人衆勝天.’ 天 定勝人,果何理也,人衆勝天,亦何理也 往者,紅寇 랩入, 乘輿播越, 國家之命, 危如懸線. 惟公首倡大 義, 遠近嚮應, 身出萬死之計, 克復三韓之業. 凡今 之人, 食於斯寢於斯, 伊誰之功歟 雖有其罪, 以功 掩之, 可也. 罪重於功, 必使歸服其罪, 然後誅之, 可也. 柰何汗馬未乾, 凱歌未罷, 遂使泰山之功, 轉 爲鋒刃之血歟 此吾所以泣血而問於天者也. 吾知 其忠魂壯魄, 千秋萬歲, 必飮泣於九泉之下. 嗚呼, 命也如之何, 如之何” 芳實子中文. 祐子, 年甫十 餘, 遊市街, 人爭以物饋之曰, “今我輩獲安寢食, 三元帥之功也.”至有垂涕者. [국역]김용(金鏞)이 홍언박(洪彦博)·유탁(柳 濯)·염제신(廉悌臣)·이암(李岩)·윤환(尹桓)·황 상(黃裳)·이춘부(李春富)·김희조(金希祖)와 함 께 교지(敎旨)를 받들어 방문(榜文)을 걸기를, “안우(安祐) 등이 불충하여 정세운을 함부로 죽 였다. 안우는 이미 처형당하였으니 김득배(金得 培)와 이방실(李芳實)을 잡는 사람은 3등급을 올 려임명하겠다.”고하였다.〈그리고〉대장군(大將 軍) 오인택(吳仁澤), 어사중승(御史中丞) 정지 상(鄭之祥), 만호(萬戶) 박춘(朴椿)과 김유(金 庾) 등을 나누어 보내 그들을 잡게 하였다. 이날 이방실이 행재소(行在所)에 나아가면서 용궁현 (龍宮縣)에 이르자 왕은 이방실의 장인인 우산기 (右散騎) 신순(辛珣)과 안렴(按廉) 성원규(成元 揆)에게 가서 맞이하게 하였다. 박춘이 도착하여 교지를 가지고 왔다고 하자 이방실이 뜰로 내려 와서 꿇어앉았다. 오인택이 칼을 빼어 내리치니 바로 엎어져 기절하였다가 조금 후에 다시 깨어 나서 담을 넘어 달아났다. 박춘이 쫓아가 그를 잡 으려고 하니 이방실이 박춘의 칼을 뺏으려고 하 였는데, 정지상 등이 뒤따라와 그를 쳐서 죽였다. 김득배는 기주(基州)에 이르러 변고를 듣고 기병 몇 명을 거느리고 도망쳐 산양현(山陽縣)의 선영 (先瑩) 곁에 숨었다. 그의 아우 김득제(金得齊) 를 화산(花山)으로 유배 보내고 김득배의 아내와 자식을 잡아 가두고 국문하였다. 그의 사위인 직 강(直講) 조운흘(趙云 )이 장모에게 말하기 를, “바른대로 말하여 고초당하지 마십시오.”라 고 하니 장모가 오랫동안 참다가 마침내 고백하 였다. 이에 김유·박춘·정지상·성원규 등이 김득 배를 체포하여 목을 벤 뒤에 상주(尙州)에서 효 수(梟首)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가 51살이었는 데, 보는 자들이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김득 배의 문생(門生)인 직한림(直翰林) 정몽주(鄭夢 周)가 왕에게 청하여 시체를 수습하고 제문(祭 文)을 지어 제사지내기를, “아아 하늘이시여! 나 의 죄가 도대체 무엇입니까?아아 하늘이시여!그 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듣건대 선한 자에게 복 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는 것은 하늘 이요,선한 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 는 것은 사람입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다 고 할지라도 그 이치는 하나입니다. 옛 사람이 말 하기를, ‘하늘이 정하면 사람을 이기고 사람이 많 으면 하늘을 이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늘이 정 하면 사람을 이긴다는 것은 과연 무슨 이치이며, 사 람 이 많 으 면 하 늘 을 이 긴 다 는 것 또 한 무 슨 이 치입니까? 지난날에 홍건적이 난입하자 〈주상께 서〉 어가를 타고 피난가시니 나라의 운명이 마치 실에 매달린 듯이 위태로웠습니다. 오직 공께서 앞장서 대의(大義)를 부르짖으시니 온 나라가 호 응하였고, 몸소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삼한(三 韓)의 대업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무릇 지금 사람들이 이 땅에서 먹고 이 땅에서 잠잘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누구의 공로입니까? 비록 죄가 있더 라도 공로로 덮어주어야 옳습니다. 죄가 공보다 무겁더라도 반드시 죄를 자복시킨 뒤에 처형해야 옳습니다. 어찌하여 전쟁터에서 흘린 땀[汗馬]이 마르지 않았고 개선하는 노래도 그치지 않았는 데, 마침내 태산 같은 공로를 도리어 칼날의 피가 되게 하였습니까? 이것이 내가 피눈물을 흘리면 서 하늘에게 묻는 것입니다. 나는 그의 충성스럽 고 장한 혼백이 천추만세토록 반드시 구천(九泉) 의 지하에서 눈물을 삼킬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 아!운명이란 것이 어찌 이러합니까?어찌 이러합 니까?”라고 하였다. 이방실의 아들은 이중문(李 中文)이다.안우의 아들은 겨우 10여 살이었는데, 저잣거리에서 놀고 있으면 사람들이 다투어 먹을 것을 주면서 말하기를,“지금 우리들이 편안히 먹 고 잘 수 있 는 것 은 세 원 수 (元 帥 )의 공 이 다 .”라 고하면서눈물을흘리는자들도있었다. /참고문헌고려사,고려사열전,고려사절요 글·사진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 l.net) 고려벽상공신박춘선생편 선조 유지를찾아븣 박춘 선생의 선원세계 서석단(瑞石壇)-광주광역시북구화암동360-4.좌상공박춘선생을비롯한아들인지,손자정손,형손의제단으로서석단이라한 다.좌상공박춘은신돈에의해광양으로유배되었다가또머리를깎여울주군의열암사로옮겨져그의부하왕안덕(王安 德)과배인길(裵仁吉)보내곤장을쳐죽이고바다에수장(水葬)시켜버려유해를수습하지못하였으며아들손자등도뿔뿔이흩어지 고수차례병란을거치면서묘소가실전되단소를마련음력3월20일을전후로한공휴일을택하여향화를받들고있다. (사진왼쪽부터손자형손,좌상공박춘,아들인지,손자정손순) 박춘 선생의 생애 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