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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만세운동. 1926.6.10 6.10만세운동은 3.1운동을 잇는 전국적, 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 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권오설 외 주동자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약 2만 4000여 명으로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형의 조직약화, 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곧 실패하였다. 그러나 만세운동은 곧 전국으로 번져, 고창, 원산, 개성, 홍성, 평양, 강경, 대구, 공주 등지에서 대규모의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 후 1927년 신간회, 근우회, 신정회 등의 조직과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