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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희는 서울 사람이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철원보통학교의 교사로 3년간 재직하다 일본에 유학하였다. 귀국 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남편인 김사국(金思國)이 주도한 서울청년회계의 청년당대회(靑年黨大會)에 참여하였다. 1923년 김사국이 간도 용정(龍井)에 동양학원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는 한편, 항일선전문을 배포하고 폭탄으로 일제 기관의 파괴를 계획하자 이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으나 임신 중이었으므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귀국 후 1924년 5월 서울에서 여성동우회(女性同友會)를 창립하면서 여성의 권익향상과 계몽운동에 투신하였다. 이어 1925년에는 경성여자청년회(京城女子靑年會)를 주도 조직하고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동회는 일요강습회를 개최하여 여성들에 대한 사회교육을 실시하는 등 여성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7년 4월에는 중앙여자청년동맹(中央女子靑年同盟)의 집행위원에 선임되어 '청소년 남녀의 인신매매 금지, 만 18세 이하 남녀의 조혼폐지, 청소년 남녀직공의 8시간 이상 노동야업 폐지, 무산아동 및 산모의 무료요양소 설립' 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27년 4월 당시의 여성운동가가 망라되어 신간회(新幹會)의 자매단체로서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할 때 창립준비위원으로 참가하여 회원모집의 임무를 맡았으며 이후 교양부의 책임자로서 계몽강연에 힘쓰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여성의식 향상과 민중계몽에 힘쓰던 중 그는 병을 얻어 30세의 나이에 서거하였다. 그의 장례는 사회단체연합장으로 1,000여 명의 각계 인사가 참여한 가운데 거행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사국은 서울 사람이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만주와 시베리아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다 1919년 귀국하여 '국민대회'에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국내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였다. 한남수(韓南洙)·이규갑(李奎甲) 등과 함께 3월 중순부터 임시정부 수립을 계획하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지면서 각 방면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대표자들이 인천 만국공원에 모여 정부수립을 결정하기로 하였다. 4월 19일 그의 집에서 안상덕(安商德)·현석칠(玄錫七)·김유인(金裕寅) 등이 회합을 갖고 자금을 모집해 서울 보신각 일대에서 4월 23일 국민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일로 일경에 체포되어 소위 제령 제7호 위반으로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0년 출옥 후 노동운동의 필요성을 느끼고 노동운동에 투신하였다. 1921년 4월 5일 조선청년회연합회(朝鮮靑年會聯合會) 집행위원으로 피선되는 동시에 서울청년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4월 9일에는 박사직(朴思稷)·김병규(金秉圭)·김종범(金鍾範) 등과 '조선교육개선회'를 조직하였다. 동년 9월에는 태평양회의에 즈음하여 조선청년회연합회 대표로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으며, 11월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흑도회(黑濤會) 결성을 주도하고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하였다. 그는 1922년 1월 귀국하여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를 조직하였다. 무산자동지회는 '동일한 사회운동에 뜻을 두는 사람만이 회합하여 무산자계급의 생존권을 확립한다'는 목적 아래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그러나 그는 1922년 11월 '신생활' 사건에 연루되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간도에서 동양학원(東洋學院), 영고탑(寧古塔)에서 대동학원(大同學院)을 설립하고 교육구국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다시 소련으로 망명해 조선사회운동의 통일을 위해 활동하였고, 1924년 귀국하여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의 결성을 주도하고 책임비서를 역임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