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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병호는 황해도 장연(長淵) 사람이다. 1914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금릉대학에 유학하였다. 1918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종막을 고하여 11월에 세계대전의 휴전이 성립되고 새해 1월부터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고 알려짐에 따라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상호간의 의견을 타진하고 긴밀한 연락을 취하기 위해 상해(上海)로 모여들었다. 그래서 1919년 초에 그는 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선우 혁(鮮于爀)·한진교(韓鎭敎)·장덕수(張德秀)·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상해 영국조계(租界)에서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강력한 추진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서는 기관지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발간하여 교포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켰다. 신한청년당의 당원 수는 약 150명 정도였으며 당내에는 재무부(財務部), 교제부(交際部), 토론부(討論部), 체육부(體育部), 서무부(庶務部) 등의 각 부서를 두고 당원이 일심 동력하여 독립운동의 선봉부대로서의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한청년당은 신규식(申圭植)이 중심이 되었던 동제사(同濟社)의 핵심 인물들이 결성한 조직 단체인데 이 당시 그는 신석우(申錫雨)·여운형(呂運亨)·선우 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조소앙(趙素昻) 등과 함께 동제사의 이사로서도 활동하였다. 신한청년당은 그 결성과 함께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파견하여 대외적으로 민족대표기관의 임무를 실행하였으며, 동시에 국내 및 노령(露領), 일본 등 각지 동포사회에도 세계 대세에 따르는 독립운동을 펴게 하기 위하여 당의 중요 인물들을 파견하였다. 즉 김규식(金奎植)의 상해 출발 직후인 2월초에 그는 선우 혁(鮮于爀)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어 독립운동 전개 및 자금 갹출과 시위계획을 추진하도록 하여 3·1독립운동의 기반을 조성한 후 상해로 귀환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3월 하순경부터 신한청년당의 간부진인 여운형(呂運亨)·선우 혁(鮮于爀)·이광수(李光洙)·김 철(金徹)·현 순(玄楯)·최창식(崔昌植)·여운홍(呂運弘) 등과 함께 프랑스조계의 보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각국을 향하여 독립선언을 하면서 임시정부의 조직에 착수하였다. 1919년 4월 25일에는 이춘숙(李春塾)·남형우(南亨祐)·장 도(張濤) 등과 함께 임시의정원법 심사위원이 되어 임시의정원법 전문 13장 57조를 가결, 채택하였다. 이후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내무부 지방국장, 대한적십자회 이사, 신한청년당 이사장, 대한인 거류민단 의사원 등으로 독립전선에서 적극 활약하였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의 황해도 장연군(長淵郡) 조사원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920년에는 미국 의회에서 극동지역시찰단이 파견되어 중국과 한국의 여러 곳을 시찰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는 6월 28일에 미국의원시찰단 환영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안창호(安昌浩)를 선임하였다. 이 당시 그는 정인과(鄭仁果)·여운형(呂運亨)·이희경(李喜儆)·여운홍(呂運弘)·이유필(李裕弼)·김순애(金淳愛)·황진남(黃鎭南)·신국권(申國權)·임춘희(任春熙)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어 8월 5일 상해에 시찰단이 상륙하여 중국에 머무는 동안 곳곳을 따라다니며 진정서를 전달하는 등 외교 공세를 전개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초창기에 난항을 거듭하게 됨에 따라 1922년에는 독립지사들이 국민대표회(國民代表會)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그는 준비위원회 서기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회의도 별다른 효과 없이 해체됨에 따라 그는 김규식(金奎植)·윤 해(尹海)·고창일(高昌一)·원세훈(元世勳)·신 숙(申肅)·도인권(都寅權)·김 철(金徹)·이청천(李靑天)·최동오(崔東旿)·여운형(呂運亨)·정광호(鄭光好)·김상덕(金尙德)·조동호(趙東祜) 등과 함께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을 새로이 조직하여 1922년 9월에 노령(露領)으로 가서 소련에 의탁하려 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사망에 따라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1923년 3월에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1925년 2월 21일에는 상해에서 신한청년회총회(新韓靑年會總會)가 개최되어 임원 개선과 금후의 사업에 관한 새로운 계획이 결정되었다. 여기서 이사장에 김규식(金奎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여운형(呂運亨)·한진교(韓鎭敎)·김 철(金徹)·정광호(鄭光好)·박 진(朴震) 등과 함께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33년에는 인성학교(仁成學校) 이사장에 취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며 항일정신을 함양시키는 등 후진교육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일장기(日章旗) 게양을 강요하자 학교를 폐교시키고 새로운 활동방안을 모색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