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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의주(義州) 사람이다. 1919년 향리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가 일제 앞잡이 최영하(崔英廈)의 밀고로 집을 소각당한 후 남만(南滿)으로 망명하여,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전덕원(全德元)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 회계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1920년 6월에는 봉천(奉天)에서 윤세용(尹世茸)의 주선으로 단총 15정과 탄환 1,500발을 구입하여 귀대 중, 봉황성 대와보(鳳凰城大瓦堡)에서 토군(土軍) 백여명에게 포위되어 무기 일체를 강탈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그는 수천어의 필설(筆舌)로 무기구입의 목적과 사정을 역설, 중국 토군의 양해를 얻어 무기 전부를 반환받았다. 한편 대한독립단의 해상전권위원(海上專權委員)이 되어 문제업(文濟業)과 함께 국내에 들어와 해륙(海陸)기관조직에 전념하기도 하였다. 1921년 3월에는 김상률(金相律)과 함께 압록강 상류 유초도(柳草島)에서 해상교통국장 백승서(白承瑞) 등과 연락하여 안동현(安東縣)의 일본 영사관 습격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일군경의 습격을 받아 실패하였다. 1923년에는 남만 지역에 위치한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던 중 1925년 3월 16일 즙안현 고마령(輯安縣古馬嶺)에서 국내 진입을 위한 작전회의를 하고 있을 때, 일본 군경의 습격을 받고 교전중 참의장 최석순(崔碩淳) 등 29명이 전사하고 그는 체포되었다. 결국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후에는 한국독립운동사를 편찬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