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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원제일교회와 독립운동 철원제일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철원군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0.11.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제일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4년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건축에 공헌했던 김철회는 일찍이 자신이 설립한 배양학교(나중에 교회시설인 정의학교 개칭)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며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철원제일교회에서 운영하던 정의학교와 영동야간학교는 1919년 3.1운동 때 시위운동의 저력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교회의 학생, 교사, 성도, 전도사들이 시국에 대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하여 철원읍 만세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철원성결교회 곽진근 여전도사는 정의학교 여교사 김경순 등과 함께 철원읍내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시가지 진출 때 군중을 이끌었다. 곽진근은 3월 11일에도 700여명의 군중 선두에 서서 철원역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곽진근은 1995년 대통령 표창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철원에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했던 철원애국단이 있었다. 철원애국단은 김화 출신 김상덕을 주축으로 하였는데 그는 3.1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경성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에 잡혀 옥고를 치르고 1919년 8월 6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8월 9일 김상덕이 박연서 목사와 함께 결의한 후 강대여, 김철회, 김완호, 이용우, 이봉하 등과 함께 철원애구간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의 조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군단을 조직하거나 조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1월 김상덕, 박연서, 강대여, 김철회 등이 일본경찰에 차례로 체포되었고, 철원애국단 사건 관련자들은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성서 출애굽기를 통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