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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善大夫工曹參判贈正二品都憲鄭公殉義碑(가선대부 공조참판 증정이품 도헌 정공 순의비) 지난 갑오년 東匪(동비)들이 소요를 일으켜서 호남의 州縣(주현)들이 바람을 맞아 <결락> 그 예봉에 저항한 곳은 오직 금산뿐이었다.조그마한 이 지역을 근거로 한창 기세를 떨치던 수만 명의 도적을 막다가 마침내 힘이 부쳐서 죽음을 당하였으니, 그 사람은 바로 고 참판 동래 정숙조 공이었다. 옹은 일찍이 이 고을의 수령을 지내면서 사랑을 베풀었으며 군인(郡人)들은 공을 신뢰하였다. 뒤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올 봄에 적이 군을 침범하자 군의 주민 김제ㅛㅇ은 계획을 세워 저들을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로 인해 적들이 울분이 쌓여 제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자 하니 온 경내가 두려워 흉흉하며 조석을 보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군내의 신사들이 적을 막고자 의기를 발휘하여 공을 주맹으로 추대고 여러 요충지를 나누어 방어하였다. 이렇게 하니 무릇 5개월동안 적이 감히 침범하지 못하였으며 백성들은 그 덕에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10월에 이르러 영남과 호남의 비도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고립무원의 금산성이 여러 겹으로 포위되었다. 적은 저돌적으로 전방을 향하여 돌진하였으며 병력의 차이가 현격하여 성은 마침내 함락되었다.정지환 부자와 형제 및 정두섭은 모두 적에게 살해되었으며 동시에 죽은 자가 60여명이었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피하라고 권유하자 공은 의연히 동요하지 않았으며 결국 적에게 잡혀서 제원역 남문 밖으로 끌려갔다. 적 수천 명이 공을 에워싸고 위협하자, 공은 크게 꾸짖으며, "너의들은 모두 선왕의 유민인데 감히 천기를 범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으니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 나는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의리상 욕을 볼 수 없다. 어찌 빨리 죽이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적의 총탄히 비 오듯 퍼부었고 마침내 공은 사망하였다. 선비와 백성들은 슬퍼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해 겨울에 나는 호남을 안찰하며 적들을 소탕하다가 공을 해친 두 우두머리를 잡아 본 경내에서 처형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통쾌하게 하였다. 이듬해인 을미년 봄에 그 전투현자을 둘러보고 단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고 <결락> 조정에 보고하니, 조정에서는 그를 특별히 정2품 도헌에 추증하였다. 황조에서 돌보시는 뜻이 매우 도탑구나! 아! 지난 임진년의 병화 때 조중봉과 고제봉 두 선생이 이곳에서 순절하시자 후신들이 의단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 공이 처음 이 군에 부임하여 군의 신사들과 의단 아래에서 의계를 조직하고 개연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엿날 조선생과 700의사가 이 곳에서 순절하셨읍니다. 지금 우리 수백인의 계원이 후일 다시 선생의 의를 본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의 죽음은 필부필부가 창졸간에 목숨을 잃은 것과는 다르며, 그 충성스럽고 의로운 마음은 평소에 축적된 것 같다. 아니면 두 선생이 죽은 뒤로 그 영령과 의로운 혼백이 흩어지지 않고 금산의 산천에 응축되어 있다가 300년이 지나서 다시 공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 그 자취를 쪽고 그 이름을 <결락> 한 연후에 그 기운이 <결락> 한 것인가? 아! 훌륭하구나. 9년이 지난 임인년에 고을 사람들이 비를 세우고자 하면서 나에게 한 마디 글을 부탁하였다. 나는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그을 위하여 명(銘)을 짓는다. 명은 다음과 같다. <결락> 오직 금산이 진용을 갖추었네. 공이 실제로 주맹이 되었으니 여러 사람들에 의해 추대되었네. 의로운 목소리를 한번 외치자 추종하는 자들이 그림자처럼 따랐네. 죽음을 각오하고 출전하여 <결락> 빛은 해와 별과 나란하며, 천년토록 진해지니 <결락> 정2품 자헌대부 원임의정부찬정 학부대신 육군부장 훈3등 이도재 지금 정3품 통정대부 전 부사 이종○씀 출처 : 금산군 남산 의병순의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