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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8월31일 금요일 8 (제140호) 시·군·구 지부 ‘일족화합(一族和合)’을 기치로 종원들의 화합을 이끌며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오면서 이제 숙원사업인 회관건립의 꿈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모색하는 청송군종친회를 찾아가 본다. 청송군은 명품사과와 명승 주왕산의 고장으로 유명하다. 1 읍 7면으로 우리박씨는 약 1200여세대가 거주하며, 선조님들 은 덕행(德行)과 학행(學行), 문행(文行), 충의(忠義), 효열 (孝烈) 등의 많은 인물을 배출함으로서 향촌사회를 선도해왔 다. 박씨종친회의 전신은 1914년 조직된 화수회다.화수회 창립 은숭덕전을수호하기위해서다.숭덕전은조선시대조정에서 관리하고 폐백을 내려 보내 제사를 받드는 국전이지만 1905 년 을사조약과 1910년 한일강제합병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내 려 보낸 운영비는 턱없이 부족하여 우리의 힘으로 숭덕전을 수호하기에 이르러 1929년 화수회가 중심이 되어 전국적인 모금운동을 통하여 숭덕전을 중수하고 위토(位土)를 마련하 였다. 이때 청송군에서도 박만규(朴滿圭,拾圓), 박해종(朴海 鍾, 五圓),박병조(朴炳朝, 五圓),박병한(朴秉漢,五圓),박찬 희(朴燦熙, 四圓) 현종 등이 동참하여 29원이란 당시로서는 거금을출연하였다.이로미루어청송군지역에도당시화수계 가 발족되어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후 화수계는 해방 과 함께 재 창립수준을 통해 박씨종친회로 명칭을 바꾸며 숭 덕전에 총본부를 두고 전국 8도에 본부, 시군구에 지부, 읍면 동에 분회를 두는 전국조직으로 태어나면서 청송군지부 또한 종친회조직이새롭게구성되었다. 이후 모든 박씨는 동조(同祖)의 혈손이라 동심(同心) 성의 (誠意)로 성전(聖殿,숭덕전)과성릉(聖陵,10왕릉)을숭봉하 면서 청송지역 또한 종친간의 친목을 도모하며 일가간의 혈 연의끈을놓지않고있다. 1956년 농지개혁령에 의해 숭덕전의 위토답이 몰수되면서 우리 종친회는 산하에 1959년 사단법인 신라오릉보존회를 설 립하였고, 이 조직은 1963년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산되면서 청송군종친회도 신라오릉보존회가 운영되면서 박명준 현종 이 회장을 맡아 40여년을 이끌어오다 오릉보존회의 파행적인 운영에 이의를 제기하며 숭덕전과 10왕을 수호를 위해 2008 사단법인 신라숭덕전릉참봉협의회를 설립 초대 이사장을 맡 았다. 그러다 2010년 9월 지병으로 영면하게 되었고, 2대 회장에 두식 현종이 취임했으나 이마저도 유명무실해져 이름만 올려 놓은 상태로 2012년 제3대 회장에 옥현 前 신덕왕릉 참봉이 취임했으나 침체된 종친회를 부활시키기에는 역부족으로 20 14년5월14일현종욱회장이제4대회장으로취임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종친회 운영은 주먹구구식으로 장부하 나 비치되어 있지 않아 종친회 연혁조차 상고해 볼 수 없어 안 타까운 실정이다. 특히 그동안 종친회에서는 크고 작은 명목 으로 모금운동을 하였으나 이 또한 흔적이 없어 불신은 쌓여 져믿음을줄수없었다. 2014년 5월 13일 청송실내체육관에서 500여 성손이 가득한 가운데 취임한 현 종욱 회장은 취임 슬로건으로 ‘우리는 하나 다’를 통해 그동안 흩어진 혈육의 정을 결속시키기 위해 최선 의노력을다할것을다짐하였다. 특히 이전까지의 종친회 운영과 오릉보존회 총본부의 파행 을 교훈삼아 투명한 운영으로 활성화를 이루겠다는 강한의 의지를 표명하고 청년회와 여성회 그리고 8개 읍면 분회가 모 두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며 취임 포부를밝힌바있다. 취임후풍부한보학상식과특유의부지런함종친들의신망 이 이어지면서 종원들의 만장일치로 재추대되어 연임을 수락 하면서는 ‘일족화합(一族和合)’을 강조하였고, 이를 위해 읍 면분회장을 중심으로 종친회를 운영하면서 청년회와 여성회 의적극적인지원을이끌어냈다. 청송군지역의 박씨는 유현(儒賢),덕행 (德行),학행(學行), 문행(文行), 충의(忠義), 효열(孝烈), 선행(善行), 과환(科 宦)등시대의사표가된많은명현(名賢)을배출한바있다. △박언필(朴彦弼)본관은 춘천으로 중종조에 첨추(僉樞)로 학문이 뛰어나 후학을 가르치기를 자기 책임으로 알아 향당 (鄕黨)의 자제들을 교수(敎授)하여 빈빈(彬彬)하게 성취한 이가많았다.사림이수계(修 싸)하고후손들이추모하여 정자 를 지 었 다 . △박상범(朴尙範) 춘천인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문에 소질 을 보였으며, 고종 경인(189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강에 이르러 뛰어난 학문으로 수차례 포상(褒賞)을 받았으 며, 1905년 10월에 소를 올려 사직하고 돌아와 세상일에 뜻이 없어 서적을 즐기고 가색(稼穡,농업)에 부지런하여 배옷으로 지내니 방산 허훈(조선말기 학자, 1836~1907) 선생이 칭찬하 여말하기를박모는출처가고인에게부끄러움이없다하였다. 유고(遺稿)가전해진다. △박미(朴 楣) 영해인으로 소시(少時)부터 호학(好學)하며 높은 절개가 있었다. 합문지후(閤門祗候,나라의 의식을 관장 하는 벼슬)에 징배(徵拜)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보현산에 은거하니시인(詩人)이기영지절(箕潁之節)이있다하였다. △박영준(朴永俊) 밀성인으로 임천에 은거하여 수학(數學) 에박식하였다. △박영숙(朴英璹) 반남인으로 수직으로 통정(通政)이고, 검소하고분에넘치는생각을하지않았다. △박찬의(朴燦儀)경주로부터우거하였다. △박이장(朴而章) 청송부사와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부자 가진보어천에우거하였다. △박시한(朴時翰) 밀성인으로 청풍당 박영손의 후손이다. 문학으로저명(著名)하였다. △박규진(朴 鎭) 석임 김도화의 문인으로 학문을 좋아하 며행실을돈독히하여사림의추앙을받았다.유고가있다. △박구찬(朴龜璨)무안인으로 영해로부터 청송으로 이거하 였다. △박상래(朴祥來) 밀양인으로 낙촌공 후예이다. 철종때 수 직으로 가의대부이고 예안으로부터 진보 세장에 래거(來居) 하였다. △박병율(朴炳律) 밀양인으로 규정공의 후예이다. 진사시 에 올라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이고 영양으로부터 입향 하니부동면지리에세거한다. △박자복(朴自復) 밀양인으로 낙촌공(휘 충원)의 후예이 다.인조때 승지이다.병자호란에성하맹(城下盟,굴욕적인강 화)의소식을듣고진보에둔거(遁居)하였다. △박 성(朴 惺) 밀성인으로 현풍사람이다.호는 대암으로 퇴 계문인으로 청송부사로 선정을 배풀었으며, 임란에 의병을 일으켜공로가있어송담서원에배향되었다. △박경문(朴慶門)춘천인으로 문행이 뛰어났으며 봉람서원 영건(營建)에크게기여하였다. △박정기(朴貞基) 춘천인으로 인정이 많고 후덕하여 평소 에 궁핍한 자를 구휼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었으며, 수재 를 당해 유실된 봉강(鳳江) 하류역의 보(洑)를 사재를 털어 복원하였다. 현종조 때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 용양위 부 호군(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行龍웹衛副護軍)에추증되었다. △박희락(朴希洛) 춘천인으로 효우와 문학으로 사람의 중 망(重望)이되었다. △박재우(朴載愚 )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민하여 시인(時 人)이신동(神童)이라하였다.문학이뛰어났다. △박병숭(朴炳崇) 밀양인으로 어릴적부터 문사(文詞)가 뛰 어나향리에서중망(重望)의대상이었다. △박만규(朴萬圭) 밀양인으로 성질이 단아(端雅)하고 이행 (履行) 주밀(周密)하며 문사(文詞)가 조취(早就)하고 많은 저술(著述)로유고(遺稿)가있다. △박예생(朴禮生) 밀양인이니 관(官)은 통정(通政)으로 단 아한 성품에 문사(文詞)가 맑고 매사에 순리적으로 안분자락 (安分自樂)하였다.수직으로 중추(中樞)다. △박진표(朴鎭杓) 월성인이니 성품이 근본적으로 넓고 충 중하고 풍의(風儀·풍채)가 위대하였다.만년에 부남당수산에 축실(築室)하고촉수(燭秀)라편액을이름(題)하였다. △박기우(朴基祐) 부사 성망(聖望)의 후예로 성품이 순수 하고학식이뛰어났을뿐만아니형제간의우애가남달랐다. △박기섭(朴基燮) 박기우의 동생으로 재주가 뛰어나고 유 시(幼詩)에효경(孝經)을읽다가글의음과뜻을깨달았으며, 백행(百行)을 능히 알고 어버이를 섬김에 정성을 다했다. 관 (官)참봉이다. △박유도(朴維度) 밀양인으로 퇴우정 휘 승종의 손(孫)이 다. 관(官)은 승지(承旨), 중종원년 계해(1623년)에 부조(父 祖)가 순절(殉節)하니 망명(亡命)하여 진보 감곡에 피입(避 入)하여 비명은적(秘名隱跡)하고 자호(自號)를 돈와(遯窩) 라하였고,철종조에신원(伸寃)으로복직(復職)되었다. △박기영(朴基永) 밀양인으로 낙촌공(휘 충원)의 9세손(世 孫)이다. 관(官)은 공의(工議)이다. ㅇ임천(林泉)에 은거하 며효우에돈독(敦篤)하니선인(善人)이라칭하였다. △박사경(朴思敬) 밀성인으로 행산공 후 부사 두채(斗采) 의 8세손으로 근검과 절약으로 가문을 일으키고 자선(慈善) 한 심 리 로 매 사 를 처 리 함 에 타 인 의 궁 급 ( 窮 急 )을 보 고 전 재 (錢財)를 주어 시혜(施惠)하니 향리의 모든 사람들이 칭송하 였다. △박상래(朴祥來)밀양인으로 낙촌공(휘 충원)의 후예이다. 수직으로 가선대부이고 효우가 돈독하고 의지가 청검(淸儉) 하였으며, 예안으로부터 진보 세장에 래거(來居)하여 자호 (自號)를세고(世皐)라 하였다. △박규연(朴圭演)밀성인 행산공 후(后)부사 두채(斗采)의 후예로 본성이 순후하여 모든이에 염근(廉謹)하며 어려운 사 람에게 은혜를 베푸니 향인(鄕人)이 그의 자선지심에 감탄하 였으며,관(官)은참봉이다. △박규한(朴圭한(漢)) 부사 두채(斗采)의 후예로 형제간의 우애가돈독하였으며,관은통정(通政)이다. △박문선(朴文先) 밀양인이니 1907년 9월에 김일언과 함께 청송의진에입진(入陣)하였다. 효행이라 함은 부모를 섬기고 상(喪)당하여서는 시묘(侍 墓)한 분이나 병(病)에 단지(斷指)하여 수명(壽命)을 연장케 한분 또는 엄동설한에 죽순(竹筍)을 얻거나 얼음속에서 고기 를 얻거나,기적으로 꿩 등을 구하여 부모를 봉양한 사람을 엄 선하여기록한다. △ 박수기(朴遂基) △ 박처용(朴處龍, 밀양인) △ 박인복(朴 仁復)△박기홍(朴其洪,월성인)△박동한(朴東漢,월성인)△ 박명환(朴明煥, 월성인) △ 박형래(朴亨來, 밀성인) △ 박병섭 (朴炳燮,밀양인)△박상규(朴尙圭,밀양인)△박민수(朴敏樹, 밀성인)△박용규(朴龍圭,밀양인) 여자로 부모나 시부모를 잘 모신분으로 효행이 현저(顯著) 한부인(夫人)과 남편이 일찍 죽어도 재가(再嫁)하지 않고수 절한분을소개한다. △청송심씨(월성인 박춘환의부인)△밀양박씨(밀양인 영인 의女로 월성 이종철의처) △밀양박씨(박상복의女로 평해 황 기억의 처) △ 능성구씨(밀양인 퇴우정공의 10세손 박병열의 처)△함안조씨(밀양인박동선의처)△영해박씨(박현석의女, 금녕 김만종의처)△담양전씨(밀양인 박종대의처)△의성김 씨(밀양인박용순의처)△월성박씨(박현원의女,아산장의처) -이상효부-△밀양박씨(박대봉의女,경주김사상의妻정려표 창) ▶9면으로계속 뱚시군지부를가다 박씨대종친회경북청송군지부 (신라오릉보존회) 청송군지부 정기총회는격년제로 체육관에서성손한마당행사로 치러지 면서정을돈독히하며화합을이룬다. 청송군지부 운영은 철저히 읍면분회장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사진 은정총에서종욱 회장이 읍면분회장을소개하고있다. 매행사에종원들의자발적인경품 제공은모든이를즐겁게하면서화합 의원동력이 되고있다. 정기총회후가진오찬에서정담을나누고있다.이날 행사의모든준비는 청년회와여성회원들이 손수준비하며결속력을다진다. 청송군종친회장박종욱 서(書)-청송군1200세대종원이 하나가되길기원 하고,이를위해다짐의각오의휘호이다. ‘숙원사업인회관건립을소원하며,1200여세대종원들화합의하모니연주 ’ 뱚▲청송군종친회임원 회장박종욱 부회장박정식 부회장박진성 뱜청송읍분회장박수학 부동면분회장박진석 부남면분회장박건현 뱜파천면분회장박종수 진보면분회장박종원 부녀회장박숙자 감사박삼규 감사박종숙 사 무국장박정엽 현동면분회장박병칠 현서면분회장박두근 안덕면분회장박종수 부녀회총무박옥남 청년회장박익환 청년회총무박현식 뱚▲청송군의명현(名賢) 뱚▶유현(儒賢) 뱚▶우거(寓居)-청송출신이아닌인사로청송군에 우거(寓居)하여명성과덕행이현저한인사 뱚▶학행(學行)-학문이높고덕행이겸비하여 향리의주민으로부터존경과신망이있는분 뱚▶유행(儒行)-유도를닦아실천궁행(實踐躬行)하여 행의가돈독하고지신(持身)에근신(謹身)하여 대중의모범이선비 뱚▶문행(文行)-학문을깊이닦아서그뜻을 후 세 에 올 바 르 게 전 하 고 문 장 력 이 뛰 어 나 서 향당의모범이된인사(人士) 뱚▶선행(善行)-학문이나선행이겸비하고평소 일상생활에착한행실이많은인사(人士) 뱚▶의사(義士)및의병(義兵) 뱚▶효행(孝行) 청송추현리효자각(경북 문화재자료 제180호) 이 효자각은 박득춘(朴得春)의 아들인 4효자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고종28년(1891년)에정려가내려져건립한 것이다. 박충국은 밀양인으로 그의 아우 용국, 준국, 흥국과 더불어 부친 박득춘 에게극진한 효도를다하여조정에서그 효행을포상하여정려와함께 사 헌부지평의교지가내려졌으므로 4효자정려각이라한다. 능성구씨효열각(파천면어천리) 효열부 능성구씨는 퇴우정 박승종의 10세손 박병렬(朴炳烈)의 처이니 15세에결혼하여시집이 가난하여방아품과 길삼품으로 홀로 계신시모 를정성껏봉양하고부군을공경하였다. 고종조 계묘년에 고향을 떠나 충북 진천으로 이사를 가서 살던중 시어머 니가 병을 얻자 지성으로 약을 구하고 환자의 변(便)을 맛보는 등 부인의 정성어린 간병에도 불구하고 돌아가시자 그곳에서 장례를 치뤘다. 그후 부군이 병환으로 자라에눕게되자부군의병에뱀쓸개가좋다고하는지 라,추운겨울에도불구하고주야로 축원하였더니어느날 마당에큰뱀이 나타나는지라, 잡아서 부군의 병을 낫게 하였으며, 후일 부군이 앞을 보 지 못하게 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시어머니의 산소가 타향이 있는 것을 아타까이 여겨 부인이 홀로 유해를모시고돌아오던중여비가떨어져주 아로 걸어서오던날 밤,큰호랑이가나타나길을막거늘부인크게놀라니 범이 스스로 피하였다.향리의모든사람들이 효열부라칭하였으며,문중 에서비각을건립하였다. 뱚▶효부(孝婦)·정열(貞烈)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