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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8월31일 금요일 2 (제140호) 기 획 필자는 경애왕에 대하여 지금까지 19회에 걸쳐 연재하였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1년 6개월여에 달한다. 이왕에 발표한 논문 7편을 토대로 하여 핵심만 추려 내용을 개진했다.한데 괴 이하게도 지금껏 박씨 일문 누구로부터도 이에 대한 질의, 응 답 등의 피드백이 없었다. 필자는 끝 모를 벼랑에서 돌멩이를 던지거나,막힘없는 산야에서 허공에 대고 외치는 마냥 허망함 을 끊임없이 느꼈다. 한편으론 뷺박씨 일문의 동류의식, 생명력 이 사라지지 않았나뷻하는 의심의 눈길을 거둘 수 없었다. 메아 리 없는 외침은 공허하고 처절한 독백에 불과하다. 혹여 박씨 일문이 제례와 분향 의식을 행함에 족하여,그만으로도 숭조의 역할이 끝났다고 오판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 다. 숭조는 과거의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세간에 지탄받는 의혹이 있다면 신원하는 것이 나아갈 방향일 터, 이 점에서박씨일문에대한아쉬움을차마금할길이없었다. 필자는 원래 신라 왕을 연구의 주제로 삼았다. 석사 주제는 김씨로서 최초로 왕이 된 미추였고, 박사 주제는 김씨로서 통 일의 서막을 연 김춘추였다.필자에게 신라의 박씨 왕(10명)에 게로 관심을 새삼 환기시킨 것은 예전(2007년 즈음)박씨 대종 회 사람들이었다.그 결과 필자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애왕의 죽음만을 놓고 7편의 논문을 잇달아 발표했다. 공교롭게도 그 즈음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던 경애왕의 흥청망청 주연 기사가 사라졌다. 돌이켜보건대, 필자 역시 나 름 종친들의 기대에 충실히 부응한 셈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 개로,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하는 격려와 응원의 소리가 있어 야 한다. 연구의 질적 성장을 위해선 물적 후원 역시 필요한 것 이 사실이다. 박씨 일문의 기라성 같은 인재들의 숫자와 범위 를놓고볼때,이소리없는공백은아쉬운대목이다. 필자는 김춘추(강릉 김씨), 李龍祥(화산 이씨), 고종후(장 성 고씨)등을 놓고 단행본을 출간한 적이 있다.여건이 허락한 다 면 애 초 한 두 편 의 논 문 을 추 가 하 여 경 애 왕 을 하 나 의 책 으 로 출간하고픈 심정이었다. 한데 이것이 가능할 지는 지금 확 언할수없다. 필자는 이미 여러 권의 김춘추 관련 서적을 출간했다.지난 7 월 새로운 버전의 김춘추 단행본이 다시 출간됐다. 이것은 철 저히사료를분석,학술적입장에서정리한것이다. 개인적 생각으로서는 경애왕 신원이 중요하다면 이처럼 엄 밀한 서술의 학술서, 쉽고 평이한 대중서, 학생들이 읽을 만한 핵심을 추린 교육 도서 등의 편찬이 뒤따라야 한다. 그 점에서 박씨 일문의 새로운 각성과 의식 전환이 필요해 보인다. 타산 지석의 맥락에서, 필자는 일단 본 지면을 통하여 지금껏 책으 로출간한김춘추,고종후등의내용을간단히정리하려한다. 김춘추는 603년 김용춘과 천명과의 사이에서 맏이로 태어났 다. 할아버지는 진지왕(眞智王)으로서 그가 태어나기 27년 전 신하들의 손에 무참히 쫓겨났었다.뒤이어 왕위에 오른 진평왕 은 폐왕(廢王)의 혈육 용춘을 거둬 길렀고, 자신의 둘째 딸 천 명과 혼인시켰다. 당시의 임금 진평왕은 외할아버지, 쫓겨난 임금은 친할아버지였으니, 은원(恩怨)으로 맺어진 일가(一 家)의 기구한 운명은 이에서 읽고도 남음이 있다.그가 처한 시 대 또한 격동의 세기였다. 고조선이 무너진 지 700여 년, 숱한 나라들이 밤하늘의 별들처럼 명멸했고 끝까지 살아남은 고구 려,백제,신라 삼국은 창끝을 서로에게 향하니 전쟁이 끊일 날 이 없었다.일찍부터 ‘해동의 증자’로 불린 백제의 임금 의자는 웅용(雄勇)하고 대담했다. 642년, 자신의 즉위를 기념하듯 군 사를 몰아 신라의 서쪽 40여 성을 일거에 빼앗았다. 다시 윤충 에게 일대를 주어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니 성은 무너졌고 김춘 추의딸고타소일가는목이잘려사비로옮겨졌다. 낙동강 이서 전선이 허망하게 무너진 것은 물론 낙동강 곡창 지대의 일부분이 백제의 수중에 떨어졌다.서라벌의 민심은 더 없이 흉흉했다. 사랑하던 딸과 외손자는 물론이고 3대에 걸쳐 자신의 집안이 다져온 정치븡경제적 기반도 연기처럼 사라졌 다. 븮삼국사기븯는 그가 받은 충격을 ‘하염없이 기둥에 선 채 주 위에사람이지나도알지못했다’고전한다. 어지러운세상에서웅지(雄志)를품고 그 무렵 고구려에서 연개소문이 영류왕과 대신 100여명을 참살하고 집권자가 되었다.변화의 기류를 감지한 김춘추는 고 구려로의 걸음을 자청했다.고구려로의 사행이 멈춰진 지 70여 년만의 일이었다. 누가보든 고구려는 적국이나 다름없어 무망 (無望)에 가까운 그의 적국 행은 자체로 충격이었다.김춘추는 자신에게다짐하듯나직이말했다. “어허,사내대장부가어찌백제하나삼키지못하랴.” 18년이 지난 뒷날에야 실현하게 된 ‘백제 타도’라는 일생의 목 표 가 이 한 마 디 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그가 설령 ‘백제 타 도’를 목표 삼아 고구려로 향했을지언정 당시 신라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였다.당시의 임금 선덕여왕은 고령에다 질병이 겹 쳐 통치 의욕을 상실한 상태였고, 주변의 어느 나라도 선뜻 신 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외교는 냉엄한 것이 었고세월은무상한법이었다. 정변으로 권좌에 올랐던 그녀의 아비는 자신의 집안만을 성 골(聖骨)이라 불러 대통을 잇게 했고 김춘추의 집안과는 격을 달리했다.그 연장선에서 맏이 덕만(선덕여왕)이 유사 이래 처 음 여자로서 뒤를 이었고,다시 대통은 승만(진덕여왕)에게 넘 겨졌다. 두 여왕이 집권한 20여 년간 혁신과 웅비의 기상은 사 라지고 반도의 구석에서 신라는 겨우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항명이 그림자처럼 꼬리를 물었으며 천재지변마저 잇달아 민 생은 도탄에 빠졌다.특권층은 자신의 부와 명예를 탐닉하는데 여념이 없어 나라를 생각하지 않았다. 백성들은 희망을 잃고 왜로, 백제로 다투어 떠나갔다. 한수를 차지하며 반도를 호령 한 진흥대왕의 결기(決氣)는 채 백년도 지나지 않았건만 영원 히사라진듯했다. 시대의풍운아 김춘추가 벌인 외교가 무산되고 구금된 지 어언 60여 일, 겨 울에 들어선 고구려는 설국(雪國)이었다. 밖에는 삭풍이 줄기 차게 불었다. 김유신이 혹여 군사 행동을 하지 않았다면 마흔 의 나이에 애써 벌인 외교의 실패는 물론이고 안위조차 장담하 기 어려웠을 지 모른다. 허나 일견 실패한 것처럼 비치는 그의 외교야말로 고구려 내정을 꿰뚫은 기회였고 6년 뒤 고구려와 의 싸움에서 패착(敗着)을 거듭하던 당 태종을 설득하고 역사 적인 나븡당 동맹을 이끌어낸 힘과 정보의 원천 또한 그로 말미 암은 것이었다. 이야말로 통일의 초석을 다진, 통일로 가는 거 보(巨步)의시작이었다. 이렇듯 그는 서너 단계를 내다보고 내딛는 대담한 외교를 구 사했다.때로는 목숨을 건 거침없는 외교의 행태(行態)를 띠기 도 했다. 645년 중대형이 친(親)백제 세력 소아가(蘇我家)를 거세하자 왜로 걸음을 옮겼다. 소아씨 정권이 무너졌다 해도 아직 왜는 백제의 엄연한 혈맹이었다. 범의 아가리로 자청해 뛰어든 김춘추의 대담성은 사람들의 혀를 내두르게 했다.백제 는 그의 거세에 전력을 기울였고 븮일본서기븯에서처럼 그는 억 류되었다. 그를 구원해 준 것은 선덕왕의 죽음이었다. 죽은 선 덕왕이 산 김춘추를 구한 셈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의 억 류가채1년으로과연무사히끝났을지장담하기어렵다. 외교의힘 막연하게나마 주변국은 그의 위인(爲人)됨을 알아보았음이 분명하다.외교 행각마다 그가 인질로 붙들리고 위기에 봉착한 사실은 이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고 판단하는,움직이는 외교가였다.위기의 순간마다 외교의 길에 나섰고 구금되었으며, 구금됨으로써 그 나라의 실정을 피부로 느꼈다. 그 만큼 정보의 현장에 근접한 증인이었고 우리 역사 상 전무후무한 체험 외교의 효시였다. 그는 왕손이면서 그 과 정에서의 고초를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마침내 고구려와 왜를 거쳐 차가운 겨울바람을 뚫고 그가 당 태종을 만난 것은 649년 봄이었다. 현장에서 체득한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의 자산을 가진 그가 유려한 언변으로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풀어내니 비록 당 태종이 강대국의 제왕이라 한들 즐겨 듣는 처지였고, 그를 신처럼 성 스런 존재라 말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변설에 힘입어 당은 삼 국을 바라보는 등거리 입장에서 벗어나 비로소 신라로 돌아섰 다. 처음부터 통일을 위해 발걸음을 내딛었다고 볼 수는 없으 나 어느 순간 그의 목적이 집권을 넘어 통일로 변화했음이 분 명하다. 그리고 이를 위한 밑그림의 바탕은 헌신적인 외교였 다. 비로소 신라는 긴 잠에서 깨어 세계를 향해 용솟음치기 시 작했다. 백제의멸망 654년 진덕여왕이 죽자 김춘추는 알천을 제치고 왕위에 올 랐다. 할아버지가 신하들의 손에 의해 축출된 지 76년만의 일 이었다. 김춘추의 재위 시절은 사상 유례없이 왕실 성원의 희 생이 도드라진 시기였다.둘째 사위는 백제와의 싸움에서 목숨 을 잃었고, 10대의 어린 셋째 딸은 60을 넘긴 김유신에게 출가 했다. 어디 우리 역사에서 아비가 나라를 위해 피 같은 10대의 어린 딸을 60세를 넘긴 노인에게 출가시킨 경우가 있었던가. 또 맏이 법민과 인문,문왕 등 걸음을 옮길만한 세 아들은 동짓 달 차가운 겨울 바다를 가르며 이방에서 움직였다.연개소문의 세 아들과 의자왕의 아들 41명이 영화와 안일에 젖어 나락에 치달았음에 비해 김춘추 왕가의 자손들에게는 호사(豪奢)란 낯선 단어였으며 모진 희생의 선두는 항상 그들의 몫이었다. 수만 리 외교의 험한 길을 자청하는 아비를 보고자란 그들에게 이미 다른 선택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 모두는 왕가의 자손들 이면서도 다투어 애국의 길에 나섰으며, 스스로 힘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김춘추 가(家)의 구성원을 통해서나마 적어 도 지난 시간,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진 전부를 버린 지도층이 있다는 점을 돌아보고, 찾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거기에호응을보탠민초들의값진희생역시빠뜨릴수없다. 김춘추는 통일을 위해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고 서라벌 의 군령과 정령을 직접 내렸다. 또한 사정부를 따로 두어 역심 과 불만을 품은 관리들을 색출하고 거세하게 했다. 마침내 660 년 음력 5월 26일 드디어 전군을 거병(擧兵)하니 통일의 서막 이 열 렸 다 . 훌륭한 치자가 있어야만 장수도 빛이 나는 법이고, 승전도 확신할 수 있는 법이다. 황산 벌판의 전투는 명장과 용졸(勇 卒)도훌륭하고옳은치자를만나야함을보여준다. “ 옛 날 구 천 ( 句 踐 )은 5 천 의 군 사 로 오 (吳 ) 나 라 군 사 7 0 만 을 격파하였다.오늘모두분려(奮勵)하여국은(國恩)을갚으라.” 비장한 죽음의 기운이 서려있는 계백의 목소리를 들은 군사 들 모두 찬란했던 백제의 영화가 종지부를 찍고, 그 마지막이 자신들의 손에 달려 있음을 생각하자, 걷잡을 수 없는 서글픈 감회에 젖어 서로 부둥켜안고 한없이 울었다. 드디어 힘을 다 해 죽기로 싸우니, 한 사람이 천 명을 당해내었다.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며 5천의 군사 모두가 투항을 거부하고 장렬히 산 화했다. (박순교, 외교의승부사김춘추, 푸른역사, p.462에서인용) 그랬 건만 나라의 멸망은 막을 수 없었다. 이것이 치자의 책임과 무 능이초래한정직한결과였다. 1400여년전의역사가 던져주는교훈 백제와 고구려의 집권자들은 생사를 걸고 적경(敵境)을 넘 나드는 김춘추의 존재를 보고서도 애써 외면했다.이제 체념의 극한과 불행의 고통을 모두 완상(玩賞)하지 못한 그들에게 무 슨 결기(決氣)가 남아 있어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웅략(雄 略)의 기상을 내뿜는다 말하는가. 그들은 눈앞의 적을 두고서 도 과거와 현재의 깊고 어두운 환영과 권력의 다툼에 자신들을 놓아두고 스스로 길들여지길 원했을 따름이었다.속이 썩어 곪 아드는 나라,고구려와 백제를 중심에 올려놓고 역사를 보려는 미몽(迷夢)에서 깨어야 한다. 통일은 더 이상 그들의 몫이 아 니었다. 간난을 곱씹으며 민초와 더불어 새날을 연 김춘추의 오롯한 삶은 그때나 오늘이나 품은 의미가 깊다. 오늘에야 드디어, 켜 켜이쌓인세월의무게를감아올리고그를만나야할것이다. 비로소 민족의 에너지는 하나의 중심에 집약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서막을 연 인물을 김춘추로 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그는 행동하는 국제 전략가였고 숨막히는 외교전의 승부사였 으며, 오랜 시간 미래를 한발 앞서 기획하고 준비한 치자(治 者)였다. 전쟁에 동원되던 백성들은 비로소 창칼을 풀어 생업 에 종사했고 마음의 평정을 얻었다.그의 손을 거쳐 팍스(Pax) 신라(Silla)의 서막은 열려졌다. 그런 만큼 왕의 행적과 일생 을 논한 최치원의 말은 시대를 넘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믿는다. 열조(烈祖) 무열(武烈) 대왕이 4술(四術,詩書禮樂)로 써 터를 잡고 육경으로 풍속을 교화하였으니 어찌 후손을 위해 힘쓰심이 아니겠는가 능히 그 문물을 빛나게 하셨으니, 그 공 업을 새긴다 해도 낯부끄러운 말이 없을 것이요, 글에는 넘치 는용기가있을것이다.븮대숭복사비중븯 진주에선 7만 여 유등의 등촉을 밝히는 장엄한 ‘유등 축제’가 매년 10월 행해지고 있다.7만 여 유등의 숫자는,다름 아닌 159 3년 9일간(6, 21~29)의 혈투 끝에 진주성이 무너지며 산화한 민관군의 원혼을 함의(含意)한다. 까닭에 지금 진주는 421년 전의 척박하고 슬픈 역사를 더듬으며 진주성 옛터에서 진혼제 를 행하는 셈이다.이른바 조선 왕조를 전기,후기로 쪼개는 기 점이 될 만큼,임진왜란은 중차대한 역사의 비극이자 분수령이 었 다 . 있 어 서 는 안 될 , 또 있 을 수 없 는 그 참 혹 한 7 년 전 쟁 의 용 틀임 속에 진주는 결정적 고비마다 언제나 의연히 자리했다. 임진왜란의 와중 왜군과 맞닥뜨린 조선군은 진주에서 한 번 승 리하고, 한 번 패배했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물길은 전혀 예상 치못한방향으로돌려졌다. 진주에서의 첫 전투는 1592년에 일어났다. 김시민을 중심으 로 한 총력전은 전쟁의 서막을 승리로 장식했고, 전라도로 들 어가는 육로를 봉쇄함으로써 조선의 마지막 숨통이자 곡창지 대인 전라도를 지켰다. 수륙병진을 앞세워 조선을 삼키려 한, 파죽지세의 도도한 전략은 새삼 어그러졌고 명의 참전이 더해 지며전쟁양상은급기야혼전에이르렀다. 진주에서의 두 번째 전투는 그로부터 약 1년 뒤 일어났다.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엄명에 따라 행해진 1593년의 2차 진주성 전투(6,21~6, 23)는, 조선 장악 실패의 모든 원인을 진주로 규 정하고 왜군의 예봉을 전부 동원해, 철저한 복수전을 결행한 것이었다.‘개 한 마리도 살려놓지 말라’는 도요토미의 밀명에 서가히그의복수심이어떠했는지짐작하고도남는다. 호남지사(志士)들의죽음 때마침 1593년 음력 6월의 조선 하늘에선 궂은비가 하염없 이 내렸다. 조선의 강산이 빗물에, 눈물에 온통 젖어있는 공간 속에서, 1593년 6월 29일 진주성은 물경 11만 대군의 9일 간에 걸친 맹공 앞에 덧없이 무너졌다.인근의 피난 백성을 포함한 7 만 여 인원은 일패도지(一敗塗地)되었다. 당시 <조선왕조실 록>에는 촉석루에서부터 남강의 북쪽 언덕에 이르기까지에는 쌓인 시체가 가없이 겹쳐져 있고, 청천강(菁川江 남강)으로부 터 무봉(武峰)에 이르는 5 리 사이에는 시체가 강을 덮어 떠내 려가고있었다고되어있다. 우리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나 다름없는 왜란의 기저에는 파 당과 정쟁으로 물든 당시의 위정자, 백성을 버려두고 일신의 안위만 챙겨 북으로 줄행랑을 친 선조, 자신의 위수 지역을 벗 어나 피난에만 골몰했던 썩고 병든 관리들, 그간 백성들의 고 혈을짜내며자신의배만불리며‘공자왈맹자왈’을읊었던당 시의 사변적인 사림 등등이 어김없이 자리했다.왜란은 이들이 어울려빚어낸한편의막장드라마였다. 진주에서의 두 번째 전투에서도 이러한 사정은 바뀌지 않았 다. 성난 들쥐 떼처럼 꾸역꾸역 밀려드는 적세(賊勢) 앞에서 이를 악물고 자신의 발 언저리를 지켜야 할 경상도의 의병과 관군 모두 진주성을 철저히 외면했다.곽재우는 생사를 보전하 지 못하겠다는 이유로, 이빈, 김륵 등 경상도의 수뇌들은 무용 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저마다의 이유로,생각사록 응당 지켜야 할 자리, 있어야 할 자리를 본체만체 마다했다. 육전에서 연전 연승을 거둬 전설로 불리던 상승(常勝)장군 정기룡조차 힘을 보태지 않았다. 대신 호남의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등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낯선 타관 땅 이 곳 진주에서 휘하의 7천 병사 들과 운명을 같이했다.그들의 사지육신은 갈가리 찢겨져 혼이 되고 백이 되어, 끝없는 가슴 속 충성의 단심(丹心)과 함께 넘 실대는 남강의 물길 속에 똬리를 틀었다. 당시 최경회는 예순 둘,김천일은쉰일곱,고종후는마흔의나이였다. 역사가전하는고종후 진주성을 사수하다 죽은 이들의 면면으로는,창의사 겸 경상 우도 절제사 김천일, 경상좌도 절제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진주목사 서예원, 사천 현감 장윤, 김해부사 이종인, 태안군수 윤구수, 결성 현감 김응건, 당진 현감 송제, 황간 현감 박몽열 등이었다. 한데 당시 지휘 수뇌부 중 가장 어린 고종후는 불혹 의 나이에다, 무관(無官)의 처지였다. 충무공의 위업이 크다 하나 삼도수군통제사였기에 응당 해야 할 일이었을 수 있으되, 고종후는 벼슬과 직책이 없기에 굳이 죽음의 길에 나서야 할 필연과 당위성은 없다. 까닭에 그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한 죽 음이고헌신이었다. 고종후는 1554년(명종 9년)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대는 증조 이래 예조 좌랑,대사간, 공조참의, 강원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묵향이 어린 명망가의 혈손답게 고종후는 17살 의 나이에 소과(제술과)에 합격,진사가 되었다.시서(詩書)를 재단하는 제술에 입격한 것에서 그의 문재는 넉넉히 짐작되거 니와, 성균관에서의 수학을 거쳐 1577년(선조 11년)에는 불과 24살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했다. 호남의 수재였던 그의 부친 고경명조차 26살에 합격한 것을 보면 고종후의 명민함은 유여 함이 있다. 명문거족에서 태어나, 명석한 두뇌를 지닌 그였기 에,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분명 든든한 후광에다 남다른 총명함을 지녔고 출세 가도에 터럭 하나의 장애도 없는 ‘오렌 지 족’이었다. 썩고 병든 조선 16세기의 시류에 야합하며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함구했더라면 일신의 영달은 보장된 것이 나 다름없었다. 흐린 물에는 발을 씻고 깨끗한 물에는 갓끈을 씻으며 처신했더라면, 고종후는 편안한 일생에 호의호식하며 왕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고, 어쩌면 와석종신에다 조선의 명 사(名士)로남았을지모른다. 고종후의행위가던지는교훈 고종후의 여러 행위는 현재의 가치관을 넘어선다. 고종후는 안온함을 버리고 올곧은 정도를 고집했다. 두 차례 탄핵도 감 수할 만큼 올곧음을 지녔다. 진정 곧음의 대가로 세상에 철저 히 버림받는 것은 겪지 못한 자 감히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다. 꺾일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인사,비리와 타협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인사와 관료, 진정한 의식과 철학을 겸비하되 백성을 중심에 놓고 사세(事勢)를 보는 위정자를 찾기 힘든 요즘의 현 실에서그의존재는더욱도드라진다. 고종후는 부친을 도와 처처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았다.또 부친이 금산에서 죽은 다음에는 가산을 털어 1천여 죽음을 불 사하는 사병(死兵)을 모았다.애끓는 노모의 애원과 눈물을 뿌 리치고 죽음을 각오한 채 동쪽으로 향했다. 고종후의 마지막 걸음임을 깨달은 부인이 피난처 안동에서 주야로 이동하여 남 편과의 영결(永訣)을 청했으나 이마저도 거절했다.어린 두 아 들을 앞에 두고 자신의 신념이 흔들리고 시험당할 순간에도 직 면했으나 뜻을 꺾지 않았다.가장 강한 사람도 사랑 앞에,가족 앞에 자신의 뜻을 고집하지 못한 채 접거나 추락하는 경우가 많다.현재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비리와 부패의 본질에 는 삐뚤어진 가족애와 자기애가 자리하고 있다.고종후는 훌륭 한아들,따뜻한남편,자상한 아비의 길을 모두접고삶을 보전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스스로 외면한 채,기꺼이 죽음의 길을 자청했다. 왕을 비롯하여 국록을 받던 군신관료조차 죄다 줄행랑을 치 는 마당이었다. 굳이 책임질 벼슬이나 직책도 맡지 않고 있던 고종후가 천리 이역이자 사지(死地)인 진주성에서 죽음을 고 집할 필요는 없었다.말하자면 고종후는 편안한 오렌지족의 길 을 거부하고 노블레스 오불리주를 몸소 실천한 것이었다.그러 기에 지배층의 희생과 헌신이 실종된 요즘의 현실에서, 그의 용기가던지는울림은매우크다. 고종후와 1천여 병사는 그들이 향하는 진주가 마지막 순간 의 도래임을 익히 알고 있었다.충무공의 ‘사즉생’이 죽을 각오 로 싸워서 살아남자는 것이라면, 고종후는 애초부터 ‘사즉사’, 죽을 각오로 싸워 죽겠다는 것이었다. 까닭에 고종후 휘하 전 군은 죽음의 군대였으며, 조선이 가야할 역사의 방향을 한 걸 음 한 걸음 묵묵히 걸어간,임재왜란 최고의 사건이자,향후 임 진왜란의 항쟁을 불붙게 한 원동력이었다. 장엄한 죽음의 노 래, 역사의 피날레였다. 그들이 택한 죽음은, 부패에 절어 생사 의 기로에 처한 조선을 되살리는 종교적 순교행위와 진배없는 것이었다. 고종후는 진주성을 목전에 둔 하동에서 4백의 결사대를 추 린 다음 6백여 무리를 호남으로 돌려보냈다.죽을 자와 살아 날 자가 갈리는 순간을 앞에 두고, 심연에서 끓어오르는 슬픔과 격정이북받쳐군사모두가울었다. 나아간 4백의 결사대는 진주성에서 고종후와 죽음을 함께했 고, 물러나 살아남은 6백여 무리는 머잖아 복수를 다짐하며 호 남의 수병(守兵)이 되었다. 죽음을 아끼지 않고 서로 권하는 진퇴(進退)의 아름다운 마무리는 왜란 전 시기를 통틀어 유일 하다. 당시의 군장들은 군율을 앞세워 도망자의 목을 베고 군 사의 수를 채우기에 급급했고, 븮난중일기븯에조차 군영을 이탈 해도망한자의목을베는구절이허다하게발견된다. 고종후는 위력과 군율로써 상대를 복종하고 휘하의 무리를 부린 것이 아닌, 마음을 얻어 싸움을 도모하고 신념을 함께 했 다는 점을 지울 수 없다. 권력과 지위로 상대를 짓밟고 이익을 사사로이 독점하고, 편익과 궤도를 고집하는 요즘의 세태에서 그의 행위는 더욱 고귀하게 다가온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추 구해야 할 리더십의 요체이며 정수이다.진주성 입성 이후에도 고종후에겐 살길을 찾을 명분이 수없이 많았다. 상주(喪主)의 처지에서,병약함을 이유로,외원(外援)의 전략을 내세워 사지 를벗어나길청하는강권이잇따랐으나거절했다. 1593년 6월 29일, 최후의 순간 고종후에게 마지막 시험이 다 가왔다.활로를 열겠으니 함께 도망쳐 권토중래를 기하자는 부 하의 권유였다. 그러나 고종후는 자신의 4백여 무리와의 신념 을 거론하며 끝내 죽음을 택했다. 베드로가 예수를 세 번 모른 다고 부인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은 죽음에 임박하면 변하기 마련이다. 그런즉, 광주에서 거병한 그가, 끝내 자신의 무리와 운명을 같이했다는 것은 불변의 의리이며 염치이며 신념의 완 성이었다. 마치 븮사기븯 항우본기에서 뷺강동의 자제 8천을 거느 리고 왔거늘 그들 부형이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는다 한들 내 어 찌 그 들 을 볼 수 있 으 랴 뷻라 외 치 며 죽 은 항 우 의 비 장 한 최 후 를떠올리게한다. 오늘날 이익과 사정에 따라 자신의 말을 식언하며, 위선과 기만과 허위에 가득 찬 수많은 이들을 적잖이 목도하게 된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이만한 지조와 염치를 가져야만 한다.그리 고 고종후의 이러한 면모가 바로 숱한 무리가 죽음과 삶을 함 께 할 것을 맹약하며 그를 믿고 따르게 한 원동력일 것임은 의 심의 여지가 없다. 표류하는 대한민국 호(號)에겐 지금 제2의 고종후가절실하다. 박씨 일문을 위해서는 신라 왕조에서 명멸한 10명의 박씨왕 의 행적을 상술한 시리즈(제왕 본기)를 편찬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를 바탕으로 후세를 위한 체계적 교육도 절실하다. 일 문의 정체성은 치밀하고 정교한 전략과 계획 하에서만 가능하 다는것을끝으로제안하고싶다. 박 씨 大 宗 을 위 한 숙 원 과 과 제 뱚역사비정(20븡完) 뱛Ⅰ.머리말 박 순 교 뱛Ⅱ.김춘추(603-661)의삶과역사적의미 뱛Ⅲ.고종후 복수의병장 뱛Ⅳ.맺음말 목 차 Ⅰ.머리말 Ⅱ.김춘추(603-661)의삶과역사적의미 Ⅲ.고종후 복수의병장 Ⅳ.맺음말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