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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족의 해방과 자유평등을 외치며 월례강연을 열어 독립정신을 고취했다. 1929년 봄학예회에서 토끼와 여우를 강연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제국주의를 비유 풍자하다가 일경에게 잡히어 곤욕을 치르고 감시를 받게되자 매헌은 1930년 3월 6일 장부출가생불환이란 유서를 남기고 23세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만주와 청도를 거쳐 이듬해 8월 상해로가 상해영어학교에 다니는 한편 임시정부의 상황을 탐문하던중 안공근과 박진의 주선으로 백범 김구선생을 만나서 간담상조 의기상통하였다. 이때 상해 주둔 일본군은 ??천황의 생일경축식 거행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헌은 일본군의 수뇌부를 폭사시키로 결심하고 한인애국단에 엄숙히 선서하고 4월 29일 물통과 도시락으로 가장한 폭탄두개를 가지고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홍구공원에 들어갔다.식이 시작되고 일본의 국가가 울려퍼질때 단상을 향하여 폭탄을 던지니 폭음과 함께 식장은 일대 수라장이 되었다. 사령관 白川義則(시라카와 요시노리)과 거류민단장 河瑞(가와바타)은 폭사하고 重光공사등 십여명은 중상을 입었다. 이를 바라본 매헌은 가슴에 품었던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는 건곤일척의 쾌거였고 그 굉음은 상해는 물론 중국 천지와 온세계를 뒤흔들었다. 5월 25일 일본군법회에서 사형선고를 받자 매헌은 너희와 우리는 역사와 풍속과 언어가 다른 이민족이다. 너희가 우리를 통치한다는것은 극동의 평화를 파괴하고 인류의 자유를 말살하는 야만적 행동이라고 꾸짖었다. 곧 일본에 호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金澤(가나자와)교외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니 향년 25세였다. 매헌은 죽음에 앞서 엄숙한 표정으로 남아로서 당연한 일을 하였으니 만족하게 느낄뿐이라고 하였다. 이때 고향에서는 저한당의 대문 떳장이 부러지고 장군봉이 무너지는 이변이 있었으니 어머니 김원상여사는 내 아들은 죽지않았다. 이 나라 이겨레와 함께 영원히 살것이라고 숙연히 말씀하였다. 이 의거로 말미암아 중국을 위시하여 온대륙들은 우리 임시정부를 적극으로 후원하고 국제연맹은 일본을 극동의 침략자로 규정하였으며 장개석총통은 중국의 백만대군이 하지못한 일을 한국의 한청년이 했다고 찬양하였고 중국 낙양군관학교에 1933년 한국광복군 특별반을 창설했으며 카이로회담에서 한국의 즉시 독립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조국이 광복이 되자 1945년 5월 매헌의 유해는 일본으로부터 고국에 본환하여 국민장으로 서울 효창공원에 모시고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 중장을 추서하였다. 1965년 매헌기념사업회가 조직되고 1968년에 충의사를 창건하였으며 196?년에 유품 유묵 53점이 보물 제568호로 광현당, 저한당과 부흥원및 충의사가 사적 제229호로 지정되었다. 충의사경내에는 매헌 농민 매헌기념관, 충의관, 매헌기념탑이 세워졌다. 한편 재단법인 매헌장학재단이 육영사업을 펴고 사단법인 매헌기념사업회와 월진회는 해마다 추모제와 매헌문화제를 거행하여 이곳을 독립운동의 요람지로 가꾸어 그 업적을 길이 선양하고 있다. 매헌의 그리던 조국의 광복이 이룩된지 35년, 아직 분단의 슬픔을 안고 있지만 그 동안 우리나라는 괄목할만한 발전을 하였다. 매헌이 순국한지 102년을 맞아하여 매헌기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