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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산 덕룡봉의 영산에 에워싸인 이마을 목바리에서 의사 매헌 윤봉길은 태어났다. 마을에서는 지도자로 농촌운동에 앞장서고 1932년 상해에서는 폭탄을 품고 사지에 들어가 일본군의 수뇌부를 폭살시키어 우리나라 국권회복의 대의를 박히고 25세로 민족을 위하여 산화하니 참으로 살신성인의 충이었다. 매헌은 6진을 개척한 고려의 공신 문숙공 윤관장군의 27세손이요 파평 윤황공과 경주 김원상 여사의 장남으로 1908년 6월 21일 농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본명은 우의요 자는 용기이며 매헌은 아호이고 봉길은 별명이다. 어려서 어머니의 엄격한 훈도를 받았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은 일에는 뒤로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백부 윤경공에게 글을 배우고 11세에 덕산보통학교에 들어갔으나 이듬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항일시위를 벌이고 학교를 자퇴하여 한문을 배우다가 14세에 오치서숙에서 매곡 성주록선생에게 경서와 시문을 익히는 한편 신학문의 습득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농촌운동의 경륜과 이상의 기틀이 여기서 잡혔다. 15세에는 성주 배용순과 결혼하여 아들 종을 두었다. 17세에는 오추와 옥수 등 한시집을 펴내고 학문이 깊어짐에 따라 수신치국의 대도를 깨닫고 자기의 갈길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깊은 성찰을 하였다. 어느날 오치서숙 앞에 한 청년이 공동묘지의 묘표를 분별없이 뽑아들고와 자기 아버지의 무덤을 찾아달라하니 자기 아버지의 무덤은 커녕 다른 사람의 무덤도 구별할 수 없게되자 매헌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이 청년의 무식함으로 부모의 묘를 잃고, 우리 겨레는 무식함으로 나라를 잃었음을 깨달은 매헌 문맹퇴치와 농촌운동에 앞장서기로 다짐하였다. 19세에 오치서숙을 마친 뒤,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곧 야학을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서는 한편 황조운, 정종갑, 윤은의 등과 함께 월진회와 수암체육회및 목계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촌운동을 펴고 다시 이를 한데 묶어 1929년 부흥원을 세우고 농민독본을 저술하여 애국사상을 길렀으며 모든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