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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강 _ 수원 그날의 함성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 | 99 에 참여하여 신민회의 公決과 지시에 따라 모국을 떠나 만주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고자 하 였다 . 이에 그는 삼일학교를 나홍석에게 위탁하였다 . 임면수는 극비리에 가족을 이끌고 1910 년 10 월초 봉천성 환인현 횡도촌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 1911 년 봄에 만주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서 자치기관으로서 경학사를 만들고 , 독립군 을 양성하기 위하야 1911 년 6 월에 농가 2 칸을 빌어서 신흥강습소를 만들었다 . 그런데 추 가가는 지리적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人馬의 왕래가 잦아 독립 운동 기지로서는 적당하지 못하였다 . 반면에 통화현 합니하는 동남쪽으로는 고뢰산 ( 古磊山 ) 이 30 리 거리에 있고 , 북 쪽으로는 청하지 ( 淸河子 ) 의 심산 유곡이 있으며 남서쪽으로 폐가동 ( 鬧家洞 ) 의 장산밀림 ( 長山密木 ) 이 펼쳐져 있는 준엄한 곳이었다 . 그러므로 신흥강습소를 합니하로 이전하였 다 . 합니하로 이전한 신흥강습소는 교직원 및 학생들의 노력 봉사로 1913 년 5 월에 교사 낙성식을 갖고 학교 명칭을 ‘신흥중학’으로 개칭하였다 . 1913 년 봄에 학교가 이전된 뒤 황림 초원에 수만 평의 연병장과 수십 간의 내무실 내부 공사는 전부 생도들 손으로 이루어졌다 . 그리고 동년 5 월에는 그동안 열망하던 교사 낙 성식이 있었다 . 이로부터 통화현 합니하는 우리 독립군 무관 양성의 대본영이 되고 구국 혁명의 책원지로서의 새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 신흥중학교는 1914 년에 거듭되는 천재 ( 天災 ) 로 인하여 그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 그러므로 둔전병제도를 통하여 학교의 재정을 충당하고자 하였다 . 임면수는 만주지역의 상황이 열악해 지자 , 동포들을 순방하면서 신흥무관학교 유지비 를 염출하기 위해 영하 40 도 되는 한파 적설을 무릅쓰고 썩은 좁쌀 강냉이 풀나무 죽으로 연명하면서 군사 훈련비를 조달하기에 심혈을 다하였다 . 그의 부인 전현석 여사는 무시로 찾아드는 별동대 특파대 각양 인원의 식사를 하루에 5 . 6 차례씩 밥을 지어야 했고 , 각인각 색의 보따리와 총기를 맡으며 , 챙겨주어야 하는 혁명투사의 아내로써 그 고역이란 필설로 표현할 수 없었다 . 그러므로 그녀는 독립의 어머니라고 불리웠을 정도였다 . 임면수의 비 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그 당시 독립운동자로 선생 댁에서 잠은 안 잔 이가 별로 없고, 그 부인 전현석 여사의 손수 지은 밥을 안 먹은 이가 없었으니 실로 선생 댁은 독립군 본영의 중계 연락소이며, 독립운동 객의 휴식처요, 무기보관소요, 회의실이며 참모실이며 기밀 산실이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