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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3 ) 수원상업학교 설립 ' 인재양성 ' 큰 뜻 3 ) 김세환은 1920 년 10 월에 석방돼 수원으로 돌아왔다 . 그러나 일제의 간섭에 따라 삼일 여학교 교사로 복직하지 못하고 수원시내에서 곡물상을 운영하며 사회활동과 수원지역의 대표적인 유지로 역할하며 여러 사회단체를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 1927 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합조직이었던 신간회 ( 新幹會 ) 에 참여했다 . 이듬해인 1928 년 8 월 19 일 개최된 임시대회에서 신간회 수원지회장으로 선출됐다 . 또한 외곽조직인 수원체 육회를 조직해 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속적으로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 김세환은 화성학원과 삼일학교 및 종로교회를 근거로 활동하며 수원지역의 유지로 활 동했다 . 동시에 김세환은 평생 술 담배를 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 자신이 세운 원칙에 충실한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신간회 활동 이후 1930 년대 독립운동 선상에 서 김세환의 도드라진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 . 그럼에도 친일의 흔적은 더욱 보이지 않는 다 . 치욕적인 일제강점기를 양심있는 지식인으로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살아갔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 김세환의 삶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수원지역 교육계에서 한 빛나는 역할이다 . 1939 년 삼일학교가 폐교의 위기에 처하자 그가 나서 수원출신 갑부 최상희씨를 움직여 1 만원의 희사를 받아 회생하게 했던 점과 1941 년 일제당국과 교섭해 폐교됐던 화성학원을 수원상 업학교로 다시 설립하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점이다 . 상업강습소 - 화성학원 - 수원 고등학교로 이어지는 고난에 찬 100 년의 역사에서 김세환 선생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할 은 정녕 장대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 김세환 선생은 1945 년 9 월 16 일 수원의 자택에서 운명했다 . 해방된 조국의 자유로운 하늘 아래였다 . 정부는 김세환의 업적을 기려 1963 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 . 그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 3 ) 수원인물열전 68 - 한동민 (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 2010 년 5 월 12 일 수원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