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page

제 5 강 _ 수원 그날의 함성 수원사람들의 독립운동 | 89 2 ) 민족대표로 동지 규합 , 3 · 1 운동 주도적 역할 2 ) 김세환은 삼일여학교에서 재직하는 동안 불멸의 업적을 남기게 됐다 . 즉 삼일여학교를 명실상부한 학교로 자리매김한 것과 함께 1919 년 민족사적 분수령이었던 3 · 1 운동에 주 도적으로 참여한 점이다 . 김세환은 YMCA 간사였던 박희도를 통해 1919 년 2 월 10 일경 3 · 1 운동 준비 모임에 참 가했다 . 이에 충남지역과 수원지역의 조직 책임자가 돼 활동했는데 , 충남 해미의 김병제 , 수원 남양교회 동석기 , 수원 종로교회 임응순 , 오산교회 김광식 , 이천교회 이강백 등을 만 나 민족대표로 서명하도록 승낙을 받았다 . 그러나 김세환의 서울 도착이 늦어져 독립선언 서에 기명이 끝난 상태였기 때문에 독립선언서에 기명은 하지 못했다 . 또한 수원시내의 3 . 1 운동 역시 김세환과 밀접한 연관과 주도적 역할이 있었다 . 실질적 인 책임자였던 김노적은 수원상업강습소 제 2 회 졸업생으로 김세환의 제자였고 , 박선태는 수원상업강습소 보조교사로 그의 후배였다 . 애당초 김세환과 김노적은 수원시내 3 · 1 운동을 삼일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 낭독 이후 수원시내를 거쳐 화성학원까지 가는 만세시위로 준비했다 . 그러나 일본 경찰에 탐지 됨에 따라 저녁 횃불시위로 대체됐다 . 이에 3 월 1 일 저녁 방화수류정 ( 용두각 ) 에서 수백명 이 모여 횃불시위를 펼쳐져 봉수대 , 팔달산 화성장대 등 20 여 곳에서 횃불이 올랐다 . 이러 한 횃불시위는 수원군 전역으로 퍼져 나가 전국적으로 가장 격렬한 만세항쟁을 펼치는 원 동력이 됐던 것이다 . 3 월 1 일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김세환은 곧바로 수원으로 내려오지 못했다 . 이미 수원에서도 만세 주동자들의 체포가 이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김세환은 1919 년 3 월 12 일 서울에서 체포돼 법정에 섰다 . “아무리 세계대세로 병합이 됐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 모든 물건을 대할 때 초목에서 흐르 는 이슬도 눈물이나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을 지경이었다 . ”라고 조선독립의 정당함을 논 리정연하게 답하는 그였다 . 재판장이 “이후에도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계속 운동할 것인 가 ? ”를 물었을 때 , 김세환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 “그렇다”고 짧고 명료하게 대답해 방청 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 2 ) 수원인물열전 67 - 한동민 ( 수원박물관 학예팀장 ), 2010 년 5 월 11 일 수원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