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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초빙형식으로 계속해서 권업모범장에 근무시킬 수밖에 없었다 . 그 후 1907 년 7 월 ‘정미조 약’이 체결되면서 정미조약 제 5 조에 의해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관리 로 임용할 수 있게 되었다 . 이에 1908 년 1 월 1 일부터는 권업모범장의 일본인 촉탁 직원들 이 전부 한국의 정식 관리로 임용되었던 것이다 . 1907 년 3 월 22 일 「권업모범장 관제」가 칙령 제 17 호로 고종황제의 재가를 얻었으며 , 그 해 5 월 15 일 수원에서 권업모범장 본장 ( 本場 ) 의 개장식이 거행되었다 . 4 . 권업모범장의 조직 변천과 영향 권업모범장이 한국정부에 이양된 직후인 1908 년 현재 수원에 본장인 권업모범장을 두 고 지방에는 도종묘장 ( 道種苗場 ) 및 각 지방 농업기술관이 배치되었다 . 그러나 1910 년 8 월 대한제국이 일제에 강점됨과 동시에 권업모범장은 조선총독부의 관할로 들어가게 되 었으며 , 지방의 종묘장은 지방청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 . 그해 9 월 「조선총독부 권업모범 장관제」가 발포되었으며 , 「사무분장규정」이 공포되었다 . 권업모범장에는 전임 기사 10 명 , 전임 서기 · 기수 35 인을 두고 있어 한말 때보다 실질적으로 조직이 확대 · 개편되었다 . 이와 더불어 권업모범장은 종래의 ‘출장소’를 ‘지장 ( 支場 ) ’이라 개칭하면서 , 농림업에 필요한 실무를 교습하기 위해 농림학교를 두었으며 , 대구 · 평양 · 뚝섬 · 용산 · 목포의 5 개소에 지장을 설치하였다 . 이로써 권업모범장은 1 본장 , 5 지장 , 1 학교로 구성되면서 식민 지 농업수탈의 기반을 구축하고자 하였다 . 수원 본장의 사무분장은 서무계 ( 庶務係 )· 종 예계 ( 種藝係 ), 축산계 ( 畜産係 ) 로 조직되었다 . 1914 년에 이르러 일제는 지방제도의 개편하는 등 식민지 지배체제를 정비하면서 , 권업 모범장은 단순한 지도 · 장려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비로소 시험 · 조사를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 권업모범장이 연구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것은 1918 년 3 월 30 일자로 관제가 재개편되면서부터이다 . 이제 권업모범장은 단순한 농사개량 장려기관으로서의 역할보다 는 실질적으로 농업의 제반에 관한 연구를 진행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는 것이 필요한 시 점이 되었다 . 그래서 권업모범장의 본장이 있는 수원에 1918 년 곤충병리계 ( 昆蟲病理係 ) 를 두고 오로지 병충해에 관한 시험조사를 행하도록 하였다 . 기존에 곤충 및 병리에 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