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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일형면 · 안룡면 일대에 최초로 여화 ( 麗華 ) 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 동척 · 동산농사주식 회사 · 국무합명회사가 조합 창설에 주도적 역할을 하였으며 , 호리우치 ( 堀內順一 )· 유키 나리 ( 飯田幸成 )· 이와사키 히사야 ( 岩崎久彌 ) 등의 일본인 대주지와 박건유 ( 朴建裕 )· 이 종익 ( 李鐘翊 ), 용주사 주지 강대련 ( 姜大連 ) 등이 창설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 일제의 산미증식계획 추진에 따라 수리조합 육성책으로 수원군에서는 1920 년에 장지 제 ( 長芝堤 ) 수리조합이 설립되었는데 , 이것도 여화수리조합과 마찬가지로 일본인 영농회 사가 주도를 하였다 . 1927 년에는 수룡 ( 水龍 ) 수리조합이 설립되었는데 , 수원군과 용인군 양군에 걸쳐 있다고 하여 이름을 수룡수리조합이라고 하였다 . 창설자는 동척 , 동산농장 , 국무합명회사 등 일본인 농업회사들이었다 . 그밖에 한국인들로는 홍민섭 ( 洪敏燮 ), 오덕 영 ( 吳悳泳 ), 오성선 ( 吳性善 ), 용주사 주지 강대련 ( 姜大連 ) 등 대지주들이었다 . 이 수리조 합의 몽리구역은 주로 수원군에 치우쳐 있고 용인군은 대부분 저수지 부지였다 . 조합의 중심지역은 일본인 대주지들의 소유지인 수원군 태장면과 안룡면 일대였다 . 그 후 별다른 수리조합이 만들어지지 못하였다가 1939 년에 일월 ( 日月 ) 수리조합이 설립되었고 , 1942 년 에 방교 ( 防橋 )· 광교 ( 光敎 ) 수리조합 , 1943 년에 우정 ( 雨汀 ) 수리조합 , 1944 년에 일왕 ( 日旺 ) 수리조합이 설립되었다 . 3 . 권업모범장의 설립 일제는 침략 초기부터 한국에서 농업수탈을 최대화하기 위해 전통적 농업기술체계를 개량시키기 보다는 당시 한국보다 농업생산력이 높았던 일본식 농업기술을 이식하는 방 법을 채택하였다 . 일제는 한국의 전통적 농업생산 방식이 약탈적이고 생산력이 낮았다는 점을 들어 일본식 농법체계를 강제적으로 보급시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 이를 위해 일제는 한국에 일본식 농법을 체계적으로 보급할 수 있는 농업기술기구를 창설하고자 하였고 그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기구가 권업모범장 ( 勸業模範場 ) 이라고 할 수 있다 . 일제가 한국에 농업을 조사하고 시험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하고자 한 것은 개항 이후 한국의 쌀이 일본으로 대량 수출되면서부터였다 . 한국에서 쌀 생산을 확대하고 , 쌀의 품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한국농업 전반에 대한 개량이 필수적이었다 . 이에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