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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강 _ 수원의 농업과 권업모범장 | 69 채택하여 소작인이 8 , 334 명이나 되었으며 , 말음도 1 백 명이 넘었다 . 그리고 1912 년 4 월부 터 수원군 남부면 ( 1914 년 이후 臺章面 ) 지동에 모범촌을 두고 체계적으로 일본식 농업기 술체계를 보급하고 있었다 . 일제당국에서도 동산농장에 대해 보조금을 지급하고 수시로 기술관을 파견하여 제반 시설에 편의를 제공하고 있었다 . 동산농장은 소작인들에게 각 부 락마다 농사개량을 위한 조합을 조직하고 , 관개구 ( 灌漑溝 ) 의 수리 , 악수로 ( 惡水路 ) 의 개 선 , 경서 ( 耕鋤 )· 시비 ( 施肥 )· 제초 ( 除草 )· 선종 ( 選種 ) 강조 , 비료의 조제 등을 통해 노동 력 착취를 강화하고 있었다 . 동산농장의 소작인에 대한 강도 높은 노동력 착취는 농민들 의 반발을 사게 되게 되었다 . 수원은 토지가 넓고 비옥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장이 많이 설치 되었다 . 동척은 일제하 최대의 식민 농업회사로서 , 한국인들에게 “살을 뜯어먹고 뼈를 갈 아먹는 그 무엇이 있다하면 동척 이상이 어디 또 있으랴” 라고 할 정도로 한국의 토지와 농업을 수탈하는 원흉이었다 . 3 · 1 운동 당시 격렬한 시위가 있었던 수원군 송산면은 대 표적으로 동척농장이 존재했던 지역이었다 . 현재 송산면 사강시장 앞 벌판은 가장 넓은 농토가 있었던 곳으로 , 이곳에 동척 및 일본인들이 다수 진출하여 토지를 소유하고 농사 를 지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 3 · 1 운동 때 동척농장에서 소작을 하고 있던 송산면 농민들 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함으로써 일제의 보복을 받아 가옥을 잃고 이재민이 되어야만 했다 . 또한 위의 < 표 > 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산농장이나 동척농장 이외에도 국무농장과 조선 신탁 등의 일본인 농장과 회사에도 많은 한국인 소작인들이 있었다 . 이들은 일본인의 가 혹한 착취 밑에서 신음하다가 3 · 1 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 판단된다 . 2 . 수원의 농업환경 수원은 서울의 남쪽에 위치하고 큰 강은 없지만 자연환경은 농업을 경영하는 데에 매 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 이에 따라 일찍부터 일본인들도 수원의 농업환경에 탐을 내고 식민 농업회사와 농장들이 많이 설치되었다 . 수원에 이주한 사카이 마사노스케 ( 酒 井政之助 ) 라는 일본인은 “수원은 땅과 기후가 순화한데다 지질까지 매우 좋고 , 조선 특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