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page

제 4 강 _ 수원의 농업과 권업모범장 | 67 1 . 일본인 대지주의 토지 침탈 수원에는 조선시대 정조대왕이 천도를 계획하면서 , 화성 ( 華城 ) 을 쌓고 부중 ( 府中 ) 에 8 채의 웅장한 주택을 지어 놓았다 . 그리고 각도에서 거부 ( 巨富 ) 를 뽑아다가 이곳에 살게 하니 이것이 소위 수원의 ‘팔부자집’이었다 . 수원에는 이처럼 부자가 많았기 때문에 일제 시대 외국인 선교사들도 “수원에는 부자들이 많다”라고 할 정도였다 . 3 · 1 운동 당시 매티 노블 (Mattie W. Noble) 선교사의 기록에 보면 , “화수리 마을에서는 시골 부자의 큰 집이 불탔다 . 그 집은 37 칸 ( 1 칸은 사방 8 피트 , 약 2 . 4 m) 크기로서 17 칸 규모의 2 층집이 달려 있 었다 . ”고 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가 있다 . 또한 수원에는 경부선 ( 京釜線 ) 과 경동선 ( 京東線 ) 이 통과하면서 일본인 거주자가 생기 게 되었다 . 철도의 개통에 따른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각 지역의 사람들이 수원에 쉽게 접 근할 수가 있었다 . 철도로 인해서 수원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접근하기가 비교적 쉬 웠다 .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조선의 소작관행』을 보면 수원군 지주의 소작지는 77 % 가 군 내에 있고 , 도내지주가 19 %, 도외지주가 4 % 에 불과하였다 . 서울이 가까움에도 불구하고 재지지주가 많이 살고 있었는데 , 그 이유는 이곳이 물산이 풍부하고 교통이 편리하기 때 문에 굳이 서울에서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 일제는 침략 초기 한국의 토지가격은 일본과 비교하였을 때 1 / 10 ~ 1 / 30 정도로 매우 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