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page

제 3 강 _ 철도의 개통과 근대 삶의 변화 경부선, 수인선, 수여선 이야기 | 63 결국 수인선 철도는 해방 이후 1946 년 5 월 10 일에 사철에 대한 국유화 조치로 국유철 도가 되었다 . 수인선은 해방 후 1960 년대까지만 해도 증기기관차가 객차 6 량 , 화물차 7 량을 달고 수 인선 15 개역을 하루 평균 7 차례 운행했다 . 그러나 자동차의 등장과 서울 중심으로 교통 흐름이 재편되면서 적자가 늘어나자 철 도청은 1979 년 송도 - 남인천간 5 . 9 ㎞의 운행 중단에 이어 , 1992 년 7 월 소래역 - 송도역 운행 이 끊기고 , 수인선 복선전철화 계획이 구체화된 지난 1994 년 9 월에는 한양대 안산캠퍼스 - 송도역 26 . 9 ㎞ 구간을 폐쇄하여 수원 - 한양대역까지 운행하다가 이마저 다시 1995 년 12 월 31 일 완전 폐선되었다 . 철도청은 이 협궤운행으로 연간 상당한 적자를 보면서도 교통수단이 불편한 서해안 주 민들을 생각하고 기차의 공익성을 감안하여 한동안 폐선하지 못했던 것이다 . 5 . 맺음말 오늘날 수원지역의 교통 흐름은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식민지 시대 수원지역의 철도는 여러 면에서 경기남부지방 교통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 특 히 , 자동차 교통이 미미했던 그 시기에 수원지역의 철도교통은 오늘날에 못지않은 중요한 위치였다 . 우리나라 간선철도 ( 幹線鐵道 ) 의 가장 큰 축인 경부선이 용인 - 죽산 노선을 택하지 않고 수원을 지나게 된 것은 당시 수원지역의 경제적인 위치가 일정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또 수원지역 사람들은 정조 관련 역사 유적을 지키기 위해 경부선이 지지대 고개를 뚫고 팔달산 서쪽으로 지나가는 노선을 막아서 오늘날까지 많은 역사 유적이 지켜지게 되었다 . 수원역은 한국 간선철도의 중심인 경부철도와 경기남부 지방의 동서 간 물자운송을 책 임진 수여선 , 수인선의 중심역이었다 . 수원역은 경부선 개통시에는 보통역으로 출발하였 지만 수여선이 개통된 이후부터는 여객과 물동량이 늘어나서 상당히 중요한 역으로 성장 하였다 . 역사 ( 驛舍 ) 도 전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식 전통 가옥형태로 건축하여 역사성 있는 도시의 상징을 갖게 됐으며 , 이후 여러 번의 개축과 신축을 통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