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page

62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속속 집하되면서 인천과 수원지역의 경기는 호황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 . 48 ) <사진 8 >소래 철교 위를 달리는 1970 년대 수인선 협궤열차 48 ) 『조선총독부통계연보』 1937 - 38 년도 자료에 의하면 인천항의 물동량이 약 1 , 7 배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 49 ) 화성군사편찬위원회 , 『화성군사』 , 1990 , 508 쪽 . 50 ) 이창식 , 2003 , 앞의 책 , 130- 131 쪽 . 수인선은 수원과 인천간의 여객수송은 물론 각종 화물을 운송하게 되어 항도 인천과 내륙의 요충지인 수원 사이에 경제 · 사회 · 문화적인 교류를 1 일 생활권으로 압축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이 철도의 설립 목적은 당시 여주 , 이천 곡창지대에서 생산되던 최고 품질의 쌀을 일본 본국으로 보내는 한편 , 강원도 벽지의 풍부한 물자를 인천항으로 수송하는 동시에 군자 · 소래 · 남동 등지에서 생산되는 소금을 산간 오지에 수송하는 데 있었다 . 또한 조만간에 개장이 될 인천 송도유원지에 철도편을 연결시킴으로써 위락인구에게 교통편의를 제공하 고 , 지역 간의 경제를 촉진시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 49 ) 그러나 무엇보다도 수인선 개통 후 화물의 수송량이 늘어나 인천항역 구내 야적장에는 강원도 지방에서 벌채한 원목이 가득 쌓였고 , 경기남부의 곡물과 서부의 소금이 창고에 가득 채워져 결국 철도라는 문명의 이 기에 의해 조선의 자원은 이출 ( 移出 ) 이라는 이름으로 수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 5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