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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강 _ 철도의 개통과 근대 삶의 변화 경부선, 수인선, 수여선 이야기 | 49 고 철도원이 까닭 없이 항의하여 철도 공사가 지연되오니 자기들 회사의 요구를 받아 달 라고 간청하자 , 고종이 잠시 숙고한 후 철도원의 유기환 총재와 협의하라고 칙지 ( 勅旨 ) 를 내리고 비교 답사의 결과도 하문 ( 下問 ) 하였으나 철도원 당국은 여전히 노선 변경을 고집 하였다 . 12 ) 그러자 일본 철도회사도 이를 하야시 공사에게 보고하였고 공사는 “이 이상 미온적인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 . 회사는 조약의 규정에 의거 공사를 개시한다 . 만약 한국 관리가 공사를 제지할 경우에는 곧 이에 대항한다”라고 강경한 의사를 표시하였고 1902 년 6 월 1 일 일본 회사는 철도원에 대하여 사그내 ~ 오산간의 선로를 기공한다는 공문을 발송하였고 터널 공사의 모든 준비를 완료하였다 . 그러자 우리 측 철도원에서는 조사를 해보니 군산포 ( 軍山浦 , 현 군포시 ) 에서 사시현 ( 四 時峴 ) 을 넘어 대대동 ( 大垈洞 ), 서둔동 ( 西屯洞 ) 을 거쳐 상유천 ( 上柳川 ) 에 이르는 노선을 택 하면 다소 우회하지만 터널을 뚫지 않고 다른 문제는 없으니 그렇게 변경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 그러나 일본회사에서는 이를 논박하고 조약의 권리를 고집 , 6 월 1 일부터 시공하 기로 결정하였으니 유감이지만 그 요구에 응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 그러나 철도원은 지지대 고개 터널 공사에 끝까지 반대하여 경기도 관찰사 이근명 ( 李 根命 ) 에게 명하여 사그내 ~ 지지대간의 공사착수를 엄금하라고 지시하였다 . 결국 6 월 1 일의 기공은 무기한 연기되고 한 달여 양국의 갈등은 계속되다가 철도원 총 재에서 외부대신 서리로 연전한 유기환이 고종의 내지 ( 內旨 ) 를 받아 타협 절충하기로 하 고 , 1902 년 7 월 14 일 유기환이 하야시공사에게 공손하게 부탁하자 하야시가 이를 받아들 여 새롭게 철도원 총재가 된 권재형 ( 權在衡 ) 이 하야시에게 감사의 뜻을 표함으로써 이 문 제는 종결을 보았다 . 이후 일본 측에서도 철도원 우찌다 [ 內田 ] 기사가 답사해보니 노선을 변경할 경우 기존 노선보다 약 1 마일 정도 우회하지만 그 대신 터널 공사가 필요 없고 , 일본 회사에서도 가 쓰노이 [ 笠井 ] 기사장에게 실지 답사를 시켜 조사해본 바 우찌다의 의견과 같았고 오히려 12 ) 철도청 , 『한국철도사』 3 권 , 19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