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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이용하였다 . 이것은 조선왕실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식민지의 수혜를 드러내고자 함이었다 . 수원자혜의원은 1923 년 봉수당을 허물고 새롭게 본관과 신병동 및 북병동을 건축하였다 . 이후 1925 년 경기도립의원으로 명칭을 바꾸었다 . 자혜의원은 일제 식민지의 선전 도구에 불과했으며 조선인들은 진료 등 모든 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 ■ 수원기생의 대한독립만세 일제의 서슬 퍼런 무단통치가 진행되면서 1919 년 1 월 21 일 고종 황제가 승하하자 조선 민중들은 모두 슬픔에 잠겼다 . 덕수궁 내전은 물론 대한문 밖에서는 수백 명이 엎드려 매 일같이 슬프게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 이때 수원기생들도 슬픔을 감추지 못하며 가무를 중단하고 근신하였다 . 그리고 1 월 27 일 20 여명의 수원기생들이 홀연히 나섰다 . 수원기생 들은 성복 ( 成服 ) 참례를 위해 깃당목의 소복을 입고 , 나무 비녀를 꽂고 , 짚신을 신은 채 오 전 여덟시 수원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 대한문 앞에 엎드려 망곡례를 행하였 다 . 조선의 백성으로서 , 왕궁에 속했던 궁인 ( 宮人 ) 의 후예로서 나라와 국부를 잃은 한을 눈물로 흩뿌렸다 . 일제강점기 민족해방운동의 절정이었던 3 · 1 운동이 일어나자 미리 준비하였던 듯 수 원기생 30 여명은 화성행궁의 봉수당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 . 당시 화 성행궁 봉수당은 자혜의원이 들어서 기생들의 건강검진을 시행하고 있었다 . 수원기생들 은 자혜의원으로 건강검진을 가던 날 1919 년 3 월 29 일 일제의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만 세를 부르며 일제 헌병경찰들과 대치했다 . 일제 경찰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 수원지역 주 민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었다 . 수원기생들은 일본 경찰과 수비대가 총칼을 들이대고 있었으나 굴하지 않고 만세를 부르는 기개를 보여주었다 . 화성행궁 봉수당 진찬연을 빛낸 아름다웠던 화성부의 기생들 , 그 후손들이 풍류와 예 악을 이어가며 124 년의 세월이 흐른 뒤 봉수당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통곡했다 . 천한 여성으로만 취급받아왔던 수원기생들이 왕실 전통을 기억하며 누구보다도 고종 황 제가 돌아가심을 슬퍼하고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토해냈다 . 이날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이는 수원예기조합의 맏언니였던 당시 스물 셋의 김향화 ( 金香花 , 金杏花 ) 였다 . 의로운 기생 김향화는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수원기생들을 이끌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 이후 2 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을 받고 징역 6 개월에 처해져 서대문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