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page

| 31 제 2 강 _ 현장답사 신작로 근대를 품다 ▶ 삼일교 19 세기의 대대적인 개건과 보수작업 이후 화성의 수문과 다리들은 다시 70 년 만인 1922 년 화홍문과 남수문이 파괴되고 1926 년 매향교도 파괴되었다 . 한편 북수문과 매향교 사이는 상당한 거리여서 삼일여학교를 다니는 학생들의 처지에서 보면 다리가 필요하였 다 . 징검다리를 놓고 다닐 수 있었지만 별도의 쇠다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 그러나 1922 년 큰 물로 떠 내려갔던 것이다 . 이에 1926 년 봄 삼일여학교는 밀러 교장의 기부와 김세 환의 감독으로 1 , 400 원의 거금을 들여 학교 앞으로 ‘삼일교 ( 三一校 ) ’를 건립함으로써 새로 운 명물로 등장하였다 . 더욱이 1926 년 매향교가 큰물로 떠내려감에 따라 매일 500 ~ 600 명 에 이르는 왕래객이 오로지 이 삼일교로 다니게 되었다 . 더욱이 일제 당국이 아니라 삼일 학교 가 주동이 되어 만든 다리이기에 더욱 자랑스럽게 여겼다 . 수원시내를 지나는 수원천 위의 다리들은 모두 시멘트 다리로 바뀌었다 . 그나마 ‘삼일교’를 ‘북매교’로 일본인들이 불 렀던 것을 지금은 ‘매향 1 교’로 적고 있다 . ▶ 매향교 대천 ( 수원천 ) 한가운데 십자가로의 교차로에서 동쪽으로 통하는 다리는 길이 95 척의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오교 ( 午橋 ) 라 불렀다 . 수원춘팔경의 오교에서 꽃을 찾는 ‘오교심화 ( 午橋尋花:꽃놀이가 한창인 매향교 ) ’의 공간이다 . 나무다리의 오교가 돌다리로 축조되 면서 ‘매향교 ( 매향교 ) ’라는 이름을 얻었다 . 나무다리가 돌다리로 바뀐 것은 1814 년 ( 순조 14 ) 이다 . ▶ 종로교회 수원 시내의 본격적인 개신교 유입은 스웨어러 (W. Swearer, 서원보 , 1871 ~ 1916 ) 의 1899 년 보고서에서 알 수 있다 . 그 보고에 따르면 , 미북감리회 스크랜턴 (Scranton) 선교 사가 서울 이남 선교정책의 일환으로 수원에 선교기지를 세우고자 계획하고 서울에서 영 향력 있는 믿음의 사람 몇 가정을 수원으로 이주시켜 신앙공동체 형성에 노력하고 있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