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page

20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면서도 지역민들과 관계는 상대적으로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자 애를 썼다 . 지주제의 안 정적인 강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농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소작농에 의한 소작쟁 이의 1930 년대 이후 여타 지역에 비해 급속히 증가했다 . 이에 궁핍한 농민을 향한 수원지 역의 고리대금업자들의 광범한 존재는 수원 지역만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 수원 성 안 호수가 3 천호 가량 되었는데 고리대금업을 하는 자가 2 , 400 호나 되었다 . 고리대로 부 를 늘려가는 성안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축첩 ( 蓄妾 ) 의 광범한 만연과 소비지향을 보여주 고 있다 . 그러면서도 서울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과 교육 여건의 미비는 전국에서 두 번째 로 많은 서울 통학생을 만들며 수원의 또 다른 자산을 만들었다 . 1920 년대 서울 통학생이 200 명이 넘는 것으로 이들 통학생과 유학생의 광범한 존재는 동시에 수원을 역동적으로 만들었다 . 수원에서 웬만큼 사는 집안마다 일본유학생들이 반드시 존재하였고 , 유력한 가 문마다 지역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자들이 존재하였다 . 이러한 관계망은 해방공간의 좌 · 우익 갈등에도 서로 커다란 피해 없이 지날 수 있게 만들었다 . 그러나 6 · 25 전쟁 때 가장 큰 피해를 받은 곳이 수원이기도 하다 . 이는 서부전선에서 가장 북쪽에 위치한 수원비행장의 존재와 2 번에 걸쳐 서로 차지하고자 한 격렬한 공방전 의 피해이기도 하다 . 이러한 전쟁의 아픔은 지역의 유용한 자료와 기록물들이 소실되어 지역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확립을 그만큼 늦추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 그럼에도 전쟁은 전통적 유지집단의 방어기제 속에서 피난민들의 광범한 유입으로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도시가 되었다 . 더욱이 1960 년대 이후 가장 역동적이고 폭발적으로 인구 증가를 보인 도 시가 수원이다 .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하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현재 100 만 명을 넘은 유 일한 지방자치단체이기도 하다 . 따라서 해방 이후 한국의 도시변천사를 가장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도시인 셈이다 . 한편 대도회지 수원 지역 유지의 금력과 혼맥으로 연결된 강고한 카르텔에 균열을 낸 역사적 사건은 우선적으로 1950 년 6 · 25 전쟁이었지만 결정적인 사건은 1961 년 5 · 16 군 사쿠데타였다 . 5 · 16 군사정변 이후 중앙권력과 결탁한 젊은 신흥세력이 정치권력을 장 악하고 점차 경제계를 재편하면서 지역에 근거한 유지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 5 · 16 군사쿠데타 이후 정치세력이 새롭게 재편되었을 때 수원의 이병희 국회의원은 박정희 정권과 끝까지 함께 했다 . 18 년간 이어진 박정희 체제의 장기지속은 이러한 정치 적 영향력에 힘입어 문화적 · 경제적 세력으로 기존의 유지집단을 새롭게 재편하였고 ,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