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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 수원박물관 제 16 기 박물관 대학 근대 수원과 수원사람들 을 해결할 수 있는 전망은 극히 작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후략).4 ) 아사히신문은 , 양국이 정식조인식을 6 월 22 일로 정해 놓고 교환공문에 대한 회의를 진 행시켰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고 결과적으로 일본 측이 한국 측에 많은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도했다 . 일본의 양보 때문에 한국 측이 독도를 한국영토로 주장하는 한 실제 로 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전망 , 즉 독도를 일본영토로 만들 수 있는 전망은 극히 작다고 이 신문은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 6 . 위안부문제 1 ) 위안소 설치라는 범죄행위 일본은 1930 년대쯤부터 중국에 위안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 우선 일본의 위안부문제 는 위안소를 만들었다는 행위자체가 전쟁범죄였다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 그러고 구체적인 폭력행사에 의한 강제연행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 일본 아베정권은 위안부 강제연행의 증언기록을 허위로 만드는 작업을 조직적으로 진 행시켰다 . 그것이 바로 ‘요시다 세이지’ 증언을 허위로 몰아가는 작업이었다 . ‘요시다 세이 지’란 1942 년부터 3 년간 일본의 재일 조선인이나 한반도의 조선여성 200 명 이상을 ‘위안 부 사냥’이라고 칭하여 강제 연행했다고 고백한 인물이다 . 2012 년 아베총리는 고인이 된 ‘요시다 세이지’를 사기꾼으로 몰아갔다 . 그리고 많은 우 파 미디아들은 요시다의 ‘위안부 사냥’ 증언을 신문지상에서 16 번이나 공표한 아사히신문 을 폐간시켜야 한다고 몰아놓았다 . 그런 여러 방면으로부터의 압박을 못 이겨 아사히신문 은 ‘요시다 증언’을 모두 허위로 결정해 허위를 기재한 행위를 사죄해서 사건을 일단락 시 4 ) 아사히신문 기사( 1965 . 6 . 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