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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 강 _ 의로운 수원기생들의 망곡례 수원기생들의 만세운동 | 107 당시 일제경찰의 조사 자료에서 파악되었는데 , 이후 체포된 기생들의 기사를 통해 수원기 생들의 만세운동의 주모자는 김향화 ( 金香花 ) 로 파악되었다 . 당시 꽃다운 나이 스물셋의 기생 김향화는 기생들의 선두에 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이들을 이끌다가 일제 경 찰에 붙잡혔다 . 이후 2 개월여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 검사분국으로 넘겨져 재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8 개월의 구형을 받았으나 최종적으로 징역 6 개월을 언 도 받았다 . 이 재판에는 실로 많은 사람들이 방청객으로 참석했었다 . 기생에 대한 재판으 로 관심사가 되었을 수도 있지만 수원지역의 유지신사와 같이 활동했던 기생들 , 상인들이 대거 재판에 참석하여 김향화의 의로움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 자혜의원 앞에서 일제의 총칼을 무서워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벌인 기생들은 앞 장에서 서술한 『조선미인보감』에 수록된 수원예기조합 33 명의 기생들이었다 . 김향화는 한자로는 김행화 ( 金杏花 ) 로 쓰였고 , 한글 이름은 김향화로 불렸던 인물이다 . 공판을 받을 당시 김 향화의 나이가 스물셋으로 이름과 나이가 정확히 일치한다 . 또한 당시 기생조합에 들어가 기가 쉬운 것이 아니었고 , 기생들의 이동도 자주 있는 것이 아니었다 . 그리고 시기적으로 1918 년 7 월경의 자료로서 , 그 다음해 만세를 불렀던 기생들은 이들이 확실하다고 볼 수 있다 . 즉 일제의 보고와 매일신보에 실린 김향화 외 30 여명의 기생들은 수원예기조합의 서도홍 , 김향화 , 이금희 , 손산홍 등 33 명으로 파악된다 . 수원기생들이 만세를 불렀던 자혜의원은 일제강점기 읍성철거령과 함께 시작된 행궁 의 파괴와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 화성행궁 ( 華城行宮 ) 은 일찍이 조선 제 22 대 임금 인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현륭원으로 옮기고 , 신읍치를 팔달산 아래로 정하 면서 시작되었다 . 그리고 화성행궁이 지어지면서 ‘화성 ( 華城 ) ’ 축성의 대역사가 펼쳐졌고 , 새로운 계획도시가 탄생하였다 . 화성행궁은 평상시에는 화성유수가 머물며 정사를 돌보 았지만 , 정조대왕은 이곳을 열 번도 넘게 방문하였고 , 1795 년 봉수당 ( 奉壽堂 ) 에서는 어머 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이 치러진 장소였다 . 일제는 조선의 왕을 상징하던 이곳 화성행궁을 무너뜨리며 식민지 행정기구와 병원을 설치함으로써 식민지의 시혜 ( 施惠 ) 적 측면을 강조하고자 했다 . 일제는 1910 년 화령전 ( 華 寧殿 ) 에 자혜의원을 설치했다 . 화령전은 정조의 사당이었으나 1908 년 9 월 20 일 정조의 위패와 어진이 덕수궁으로 옮겨지면서 비어있었다 .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자혜의원은 화 성행궁의 정궁인 봉수당으로 옮겨져 운영했다 . 그리고 1923 년 자혜의원을 경기도립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