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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룡 권영대 권영조 변상섭 변상헌 함안의 조태식 이경형 고성의 황태익 등의 동지와 일당에 모여 조국 광복에 신명을 바칠것을 맹약하였다. 그로부터 공의 눈부신 활동은 시작되었다. 태극기를 작성하고 격문 전단을 목판으로 인출하였다. 3월 28일(음 2월 27일) 고현 장날에 일어난 독립만세 시위는 광복을 보려는 흥분의 도가니요 태극기의 물바다였다. 이 시위에서 공과 권영대 변상헌 등은 피신하여 일헌병의 체포를 면하였는데 이는 후일을 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현의거 1주일 후인 4월 3일(음 3월 3일) 삼진에서 일어난 의거는 수원 선천 수안의 그것과 더불어 기미독립만세운동의 4대 의거로 손꼽힌다. 이에 관하여 당시의 공의 재판기록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피고 권태용은 한국을 독립시키려는 목적으로써 대중을 취합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연호하고 시위운동을 할 것을 기도하여 대정 8년 4월 2일 경상남도 창원군 진전면 근곡리 거주 황치순에 대하여 명3일 대중이 취합하여 양촌리 방면으로부터 진동 읍내를 향하여 행진할 것인즉 이에 참가하라고 선동하고 이어 율치리 김순삼 방에서 동면 근곡리 거주 김영종에게 대하여 명3일 독립운동을 할 것인즉 참가하라는 취지로 선동하고... 」 주문에서는 「징역 1년에 처함」이라고 하였다. 공은 두 차례의 의거 후 곧 만주로 탈출하였다가 미기에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서울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어 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니 망명 생활은 비록 동지들과 상종하였다고는 하나 풍우에 굶주림과 헐벗음과 나라 잃은 백성에 대한 박해와 부모처자에 대한 향수와 고독이 공의 심신을 병들게 하고 있었으니 그 괴로움이야 어찌 수년의 형옥에 비하랴. 그 후 다시 적국 일본으로 밀입하였으나 미구에 고종하시니 1936년 병자 4월 26일이요 향년이 51 탑동 장재산 건좌에 영면하니 그렇게도 바라던 조국의 광복을 못 보고 돌아가셔서야 그리던 조국의 땅을 밟은 것이다. 배는 밀성박씨 두효의 여로 휘 월선이며 1887년 정해에 출생하여 1926년 6월 12일에 졸하니 공과 쌍분이다. 슬하에 1남이니 영홍이요 진양강씨 만수의 여 순이를 취하였으며 그 남에 오준 오수요, 오준의 남에 경국 경도며 오수의 남에 경사다. 하루는 공의 당질 영해가 찾아와 묘명을 청하거늘 생각컨대 공과 나의 선고는 동지로 두 의거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하였으며 그로 인하여 일제하의 질곡 속에 형극의 길을 걸은 분이라 흔쾌히 붓을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