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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여명이 집단 학살 당한 것으로 추정된 산청군 시천면 외공마을의 무덤 발굴을 통해 150여구의 유골을 찾아 낸 '행사 추진위원회'는 지난 24일 산청에서 모임을 갖고, 이후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 대책위원회로 전환했다. 단체 이름은 '지리산 외공리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대책위원회'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하순(한국일보 1960년 4, 5월 기사) 혹은 3월 중순(부산일보 1960년 4월 기사), 산청 외공마을로 군용트럭을 앞세운 버스 행렬이 들어 왔다. 주민 증언에 따르면 버스는 최소 11대에서 14대였다고 한다. 버스 번호판에는 '신흥' '경북' '서울시영버스'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들 행렬은 외공마을을 지나 중산리 쪽 반천마을로 올라갔다가 빨치산들의 총격을 받고 다시 철수, 외공마을 뒤 속칭 소정골 앞에서 버스에 타고 온 영민들을 하차시켜 골짜기로 끌고 갔다. 이때 이미 낌새를 차린 양민들이 저항하면서 '아저씨 좋은 곳으로 살러 간다더니 이리 가면 우리 죽는거지요'라면서 울부짖기도 했다. 출처 : 오마이뉴스 2005.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