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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여러 차례 일본이 지원하는 관군들과 전투를 벌렸으나 그때마다 승리하였다. 이천의병들은 남한산성을 굳게 지키면서 서울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왕권을 회복시키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 서울진공작전은 일부의 배반자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고 실 패하고 말았다. 광주유수 퉁의 벼슬을 주겠다는 관군의 꾀임에 빠진 배 반자들은 3월 20일 잔치를 벌려 장병들을 술에 취하도록 하고 이튿날 새벽 몰래 성문을 열어 놓았다. 열린 성문을 통해 일제히 들어닥친 관군 의 공격 앞에 의병들은 변변한 저항도 하지 못한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김하락은 일부의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제천을 거쳐 영남지방으 로 이동하면서 여러차례 일본군과 전투를 벌리는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영덕지방 전투에서 적의 총탄을 맞고 ‘우리 5백년 예 의의 나라가 섬 오랑케에게 먹힌단 말이냐. 차라리 내 몸을 고기 배속에 장사지낼망정 왜놈들에게 욕을 당하지는 않겠다’고 크게 부르짖고 강물 에 몸을 던져 최후를 마쳤다. 3. 을사조약과 이천의 구국운동 김하락과 함께 남은 의병부대를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갔던 구연영은 도중에서 김하락과 헤어져 이천으로 돌아왔다. 그후 기독교를 믿게 된 구연영은 전도사가 되어 기독교를 전파하는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