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page

병의 중심지가되었다. 이천의 의병운동은 단발령이 내려지자 서울로부터 내려온 유생 김하 락 • 조성학 • 구연영 • 김태원 • 신용희 퉁이 중심인물이었다. 을미년 11 월 17일 이천에 도착한 김하락과 그의 동지들은 이천화포군 도령장(都 領將)방춘식과 의논하여 포군 1백명을 선발하였고, 구연영 • 김태원 퉁 이 이들올 나누어 인솔하고 인근지역으로 다니면서 의병을 모집하였는 데, 광주· 양근 ·지평 ·읍죽·죽산·안성 둥지에서 많은 의병들을 모아 이천쭈창의소(利川守f 昌義所)란 의병부대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천수창의소의 대장은 민숭천이었고 김하락은 도지휘의 엄무를 맡아 대오를 편성하고 군사들올 훈련시키던 중, 드디어 이듬해인 1896년 1월 18일 신식무기들로 무장한 일본군 수비대 1백여명과 첫 전투를 벌리게 되었다. 이천의병들은 적이 넘어오는 길목인 ‘넓고개 양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일제히 공격을 감행하였으니 적군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달 아나는 적을 광주 장청장터까지 추격한 의병들은 많은 무기와 군량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개선하였다. 2월 .13일 다시 일본군 수비대 2 백여명이 공격해 와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천의병들온 목숨을 걸고 용감하게 싸웠지만 추운 날씨에 바람을 안고 싸워야하는 불리한 조건이었던 탓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 김하락은 흩어진 의병들을 모으고 다시 새로운 의병들을 모집하여 2천 명의 의병들로 부대를 재편성하니 이천사랍 박준영으로 대장올 삼았다. 그후 이천의병진은 형세가 유리한 남한산성으로 근거지롤 옮겨 주둔하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