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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였다. 그후 일본인이 경영하는 사진점에서 일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사람들 올 멸시하고 심하게 차별대우를 하는 것을 보고 항일운동을 위해 몸을 받치기로 결심하였다. 19세 되던 해인 1923년 만주로 건너간 이 의사는 부친의 의병시절 동 지인 의군부 총재 채상덕 선생을 만나서 채상덕을 스승으로 섬기면서 많은 감화를 받게 되었다. 스숭의 권유로 유명한 김좌진 장군이 길림성 에 세운 산ι명학교에 들어간 이수흥 의사는 본격적인 독립군 간부 훈련 을 받고 이듬해 2월에 학교를 졸업하며, 1925년 3월에는 역시 스숭의 권 유로 주만참의부 독립군에 가담하여 제2중대 특무정사가 되었다. 그런데 같은 달 고마령 산골짜기에서 작전회의 중이던 참의부의 주력 부대가 동족의 밀고를 받은 일본군의 기습으로 큰 타격을 입게 되는 〈고마령사건〉이 벌어 졌다. 참의장 최석순 이하 29명의 대원이 전사하고 세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진 고마령 전투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서도 다행스럽게 생명을 건질 수 있었던 이수홍 의사는, 중상을 입은 다른 대 원 2명을 이끌고 간신히 스승 채상덕에게 돌아와 참변올 알렸다. 패전 의 책임올 느낀 스숭은 ‘조국의 광복만을 일념으로 바라고 살아온 내 뜻 올 이어받아 기회를 엿보아 거사를 감행하여 민족의 정기가 아직 죽지 않았음올 보여 달라’는 유언올 납긴 뒤 자결하였다. 스승의 유언에 따라 의거의 뜻을 품은 이수홍 의사는 1926년 5월 권 총 두 자루와 실탄을 지니고 만주를 떠나 국내로 잠입하였다. 먼저 군자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