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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쫓아와 넓고개 아래에 당도하였다. 그때 문득 대포소리가 울리며 구 연영은 전면을 가로 막고, 김귀성 • 신용희는 산중턱으로 부터 쏟살같이 내려오면서 공격하고, 조성학은 적의 퇴로를 가로 막고 사방에서 공격 을 감행하였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전투가 하루해가 지나서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고 하니 이 날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초생달 마 저 넘어가고 밤 열시경이 되자 일본군은 간신히 퇴로를 열고 도주하기 시작하였다. 도주하는 적을 쫓아 광주까지 추격을 하니 이튿날 새벽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측 기록에는 일본군 수비대가 180명이 출동하여 불과 2∼3 명만 살아돌아갔다고 하는데, 기록이 얼마쯤 과장되어 있다고 한다해도 이천수창의소가 첫 번 전투에서 눈부신 숭리를 거두었슴을 알 수 있다. 이 넓고개 전투의 대대적인 승리는 그때까지 전국 곳곳에서 벌어졌던 의병항쟁중에서 의병측이 최초로 거둔 통쾌한 승리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승리는 그후 의병봉기가 전국적으로 크게 퍼져나가는데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일본군과의 첫 교전에서 승리를 거둔 이천의병진은 사기충전하여 황 소 세 마리를 잡아 군사들을 먹이고, 사방 각 요로마다 병력을 파견하여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그러다가 2월12일 일본군 약 200명이 다시 공격 해 오자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 종일 전투가 진행되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양 군사가 일시 후퇴하였다가, 다음날 새벽부터 다시 접전에 들어 -1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