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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있다. 5. 이천파 3·1운동 한일합방 이후로는 조선인에 대한 철저한 감시와 탄압으로 노골적인 항일운동이 국내에서는 불가능하게 되어 만주를 비롯한 해외에서의 투 쟁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이 선포되면서 열화같은 만세운동이 삼천리 방방콕콕으로 파도처럼 번져 갔다. 이천지방의 3 • 1운동은 3월 30일부터 4월 5일 경까지 약 일주일간에 걸쳐 계속되었는데, 이천읍과 마장면, 신둔면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마장면에서는 관리 사람인 박종설 • 이창호 • 이기재 퉁이 주동인물이 되어 오천 장날인 3월 30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이날 저녁 오천 장터에는 약 1천여명의 군중들이 운집하여 만세를 불렀고, 일본경찰의 총검에 의해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마장면의 시위운동은 이후 2∼3일간을 계속되었으며 덕평리에서는 별도로 3백여명이 모여 시 위를 벌렸고, 박종설을 비롯한 주모자들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 었다. 신둔면에서는 서기창 • 이상혁 등이 중심이 되어 4월 1일 신둔면사무 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렸다. 지나가던 일본사람을 붙잡아 함께 대한 독립만세를 외치도록 하기도 했으며, 시위군중들은 이천읍을 향해 행진 하다가 급히 출통한 일본경찰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고 주동인물들이 체 포되었다.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