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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와서 몸을 피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구연영은 ‘내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왜 몸을 피하느냐’고 거절하고 태연히 있다가 체포되 었다. 이때 구연영의 아둘 구정서도 아버지를 도와 포교활동과 구국회의 일 을 보던 중이었다. 일본군들이 구연영 부자를 나란히 포박해 놓고 모진 고문을 하였지만 오히려 일본의 잘옷을 꾸짖다가, 마침내 1907년 음력 7월 16일 지금의 이천경찰서 서편 언덕에 있던 핵나무 아래에서 총살형 에 처해져서 부자가 함께 순국하였다. 4. 정미의명운동과 이천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트집잡아 고종이 강제로 퇴위 당하고 정미 7조약이 체결되었으며, 군대가 해산되는 퉁 조선 강점을 눈 앞에 둔 일 본의 야욕이 노골화되자 다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정미의병 에는 강제로 해산당한 구 한국 군인들이 다수 참여하였는데, 원주진위 대 출신 인물인 민긍호의 의병부대는 제천을 중심으로 충주·죽산·장호 원·여주·홍천 둥지의 중부 내륙지방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정미년 당시 이천은 구연영·구정서 부자의 구국운동과는 별개로 활발 한 의병항챙을 전개하였으니, 김봉기·임형순·정용대 같은 의병장들이 이천을 무대로 활약하였다. 백사면 사람인 임형순은 <이천창의소>를 조직하여 의병활동을 하였고, 정용대는 양평 용문산에 본대를 두고 원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