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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업을 경영하시던 종조(志釬 28세)가 엄동설한 겨울밤 함평만에다 어선을 띄워, 종손인 장군을 해제로 피신시키고 보급과 연락을 맡으셨으며, 장군의 사촌들은 가문의 대가 끊이지 않도록 먼 종가로 출후시켜 누보하는등 마무리 짓고, 1915년 82세로 한 많은 천 수를 마치셨다. 그래서 사문중 시제는 증조부모. 숙부모도 같이 합사하여 우애심을 자자손손 기리고 있다.장군은 본명 상호를 경광으로 바꾸고, 해제 기룡동 죽산안씨 종가에 은거하시며 마름을 맡았는데, 나중에 그 집에서 장군을 맏사위로 맞이했다. 장군은 슬하에 4남3녀를 두셨고, 일제강점기였던 1922.7.15 향년 57세로 통한의 생애를 마치셨다. 學吉(1903-50, 學順(1906-82),學甫(1917-96) 네 아들은 이름에 모두 學자를 붙여주신 장군의 호학정신을 받들어 주경야독하며 면학했다. 광복 후 1948년에애 아들들이 족보를 복원할때 혁명정신을 기리며 선략장군으로 신원했다. 한국전쟁 때, 종손 병태가 의용대인 우국동지회장을 맡은 일로, 좌익빨치산들이 자행했던 이른바 인민재판에서 병태의 지계존비속들이 몰살당했다. 그 아수라장에 學順이 '나도 같이 죽여라'하며 뛰어들었고, 빨치산들은 '그래 너는 누구냐 죽이라면 못 죽일 줄 아느냐'하며 결박했다. 그 절체정명순간 韓吉이 '여기 學順,學用,學甫는 모두 장군의 다을로 내 동생이지만, 병태직계는 아니니 풀어주오'하고, '동생들이 살아남아야 집안 뒤처리를 맡을 것 아니나'하며 밀어냈다. 그러나 부모형제 조카들 학살장면을 지켜보고도 결박당해서 같이 죽지 못했는데, 결박만 미리 풀렸다면 하나라도 죽여 보복한 후, 도리강변 바다로 뛰어들고 싶었다 한다. 그랬으니 남은 3형제의 우애심이 어찌 예사로웠으랴. 이 추념비는 문중 4대소가에서 150만원씩 출연하여 근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