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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의의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오랫동안 질곡의 세월을 살아온 농민들이 봉건왕조의 수탈구조와 외국의 침략에 맞서, 반봉건 반외세를 기치로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봉기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그리고 최대 규모의 근대혁명이다. 당시 호남은 물론 전국에서 수백만이 참여한 농민군은 수십만의 희생자를 내면서 1년 여 동안 처절하게 투쟁했다. 그러나 그들은 나라와 민족보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위정자들과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일본군의 신무기 때문에 좌절당했다. 동학농민혁명은 비록 당시에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 정신은 끊임없이 계승 발전되어 이후의 우리 역사를 주도하는 흐름으로 자리 잡았다. 한말 의병항쟁과 일제 강점기의 항일독립운동 등 자주독립투쟁은 물론 해방 이후의 반독재 민주화 운동과 반분단의 통일 운동이 그 정신의 연장선상에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역사적 진실이다. 한국 근대사의 서막을 연 동학농민혁명이 역사 발전을 이끌어 오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이룩한 것이다. 처음부터 열성적으로 참여한 광주,전남의 농민대중은 장흥을 비롯한 전남의 남단에서 최후까지 항전하다가 희생됐고, 바다 건너 도서 지방으로 옮겨서 의병 활동과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진압한 일제 침략자들은 혁명의 지도자들과 참여자들, 그리고 농민들을 철저하게 박해하고 탄압해 우리 민족의 저항정신을 뿌리까지 뽑으려 했다. 그러나 위대한 우리 민족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을 바탕으로 해방과 독립을 쟁취했고, 해방 이후에도 분단 극복과 민주화 운동을 전개했다. 우리 국민은 특히 동학농민혁명 100주년을 기점으로 동학농민혁명의 명예 회복운동을 줄기차게 추진 2004년 2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을 이끌었다. 구천을 맴돌던 참여자들의 넋이 구국의 선각자로 추앙받게 되었고, 숨어 살았던 후손들도 반란군의 자손이라는 잘못된 평가에서 벗어나 자랑스러운 애국자의 후에라는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 이제 동학농민혁명 120주년을 기념하는 뜻깊은 시점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이 땅에 세우고자 온몸을 바치신 선열들의 혁명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헌신하는 것과 자랑스럽고 훌륭한 통일조국 건설에 이바지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이다. 2014년 5월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 이사장 김대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