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嗚呼!! 信仰天地님들의 대의는 日夕마저 貫穿(관천)하고 그 大志는 청사에 영원하게 光輝(광휘)할것이외다. '道則天道요 學則東學이라' 創明하신 수운 최제우 교조의 심법을 전수하신 해월 최시형 2세 교조는 탐관오리의 횡포와 苛斂誅求(가렴주구)로 인하여 도탄에 빠진 민생고 그리고 열강제국의 와중속에서 풍전등화격이 된 국운을 보국안민 코자 결심하신 그 영도하에 님들은 갑오동학혁명을 일으켰던것이다. 해월교조는 '是亦天運이라' 하시고 춘암 박인호 선생을 충덕포 대접주 상암 박희인(자 덕칠) 선생을 예포 대접주로 임명하시고 '天不變道亦不變'이란 친필 통령기를 박인호선생에게 내리시었다. 이때 님들은 분연히 혁명군으로 무장하고 갑오9월 회일에 예산 미포로 부터 선타철성 신호로 각 포 상암하에 일제 기포하였다. 예포는 이북 포지리 원북 방갈리에서 혁명기를 높이 들고 총궐기하여 태안을 거점한 것이 갑오10월1일이었다. 그 대세 충천하니 동월 11일 홍주관군과 왜병이 합세하여 수천이 태안을 공격하여 오므로 혁명군과 대도소 목소리에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또한 덕포는 10월초 아산 신창에서 기포하여 수만 교도들이 해미 여미 평야에 집결하여 예포와 합세하니 그 기세 당당하여 해미전승곡에 이르니 왜병 400명 관유군 수천이 복병 돌격하여와 일대접전이 벌어졌으나 결국 혁명군의 승전으로 끝났다. 승승장구한 동학혁명군은 동월 26일 예산역 탑리(본포)에 결진하고 관작리에 유진한 왜병및 관유군 수천명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동 28일 혁명군은 홍주 교동에서 관군과 대혈전하니 폭우같은 실탄속에 피차 고성대질하는 소리 천지 진동하고 일광이 무색한 중 혁명군은 악전고투하였다. 연이 오호라!! 구국의 진충갈력도 시리를 얻지못하였으니 어찌하랴. 중과부적이라. 시산혈해의 사투도 효없이 홀연히 옥쇄되고 말았으니 민족대망의 혁명과업은 좌절되고 님들의 위국단심은 草露(초로)와 같이 사라지고 말았네. 님들이 가신지 80여년 5.16혁명이후 제3공화국은 동학혁명의 순국정신을 되살림에 즈음하여 이 땅에 잠든 님들의 영령을 영원히 신원하고자 이 탑을 세우노니 온겨레여!! 우리들은 이 거룩한 보국안민정신을 자자손손이 이어 받아 길이 길이 선양할것을 다짐하며 삼가 님들의 고혼앞에 묵념을 올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