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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97 또한 폐정개혁을 수행함과 동시에 포교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도회소의 관할 지역내에서 동학의 6임제가 시행된 점이나, 동학의 접주들이 농민군 활동을 주도한 점이나, 경상도와 전라도의 접경지역에 동학당이 많았다는 사실 327) 그리고 농민군을 ‘동학군’ ‘동학인’ 등으로 불렀다는 점으로 보아 그러하다. 이처럼 농민군의 제반활동은 광범하게 호응을 얻었다. 그러자 오래전부터 동학에 입도하고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한 채 상황을 관망하던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모두 들고 일어나 서로 “접장”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328) 이들은 염주를 목에 걸고 부적을 붙이고 주문을 외우며 총칼을 휴대하고 무리지어 진을 이루고서 산과 들을 가득 메웠다. 당시 관리들도 이와 같은 행동을 환영할 뿐 동학교인의 기세를 꺾은 적이 없을 정도였다. 동학에 입도하려면 반드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었는데, 제물로는 맑은 술과 물고기 과일 등 세 접시만 간단히 쓰도록 하였다. 329) 또한 이들은 대체로 '降神呪'와 '降靈呪' 등의 간단한 주문을 외었으나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귀천과 노소에 구애됨이 없이 똑같이 인사를 주고받아 마치 벗들이 교제하는 것과 같았다. 따라서 사노비와 역졸, 무당, 백정 등과 같은 비천한 사람들이 다투어 입도하였다. 순천과 광양의 경우에도 농민군들이 일반 평민들에게 동학에 가입하기를 적극 권유하였다. 330) 이로써 보건대, 농민군의 대부분은 동학에 입도한 것으로 보인다. 2) 영호도회소의 군사활동 2-1) 경남 서부지역 진출 영호도회소가 순천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배경은 어디에 있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순천부사의 부임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순천부사 김갑규가 1894년 음력 6월에 이임한 후 약 2∼3개월간 순천에는 새로운 부사가 부임하지 않아 공백상태에 있었다. 신임부사 李秀洪은 음력 8월에야 부임하였다. 331) 따라서 공백기 동안에는 영호도회소가 순천성내의 관아를 장악하고서 치안의 임무와 폐정개혁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수홍이 순천에 부임할 당시와 그 이후의 상황을 황현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수홍은 8월에 부임하였는데, 적 인배 등이 이미 관사를 점거하고 있으면서 관원을 대하기를 마치 죄 인 다루듯 하였으므로 수홍은 비어 있는 관아에 거처하면서 旬題를 내어 선비들을 시험하는 일로 소 일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다. (중략) 이 때 이르러 전주로 올라가다가 길에서 개남을 만났으나 가마에서 내리지 않았다. 개남은 이미 그를 괘씸하게 생각 (중략) “내가 명령지를 내어 군수 전 5만 냥을 징수할 때 너의 고을에서는 협조하지 않았는데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327)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69쪽. 328) 황현, 『번역 오하기문』, 127∼129쪽. 329) 위의 책, 130쪽. 330) 위의 책, 270쪽. 331) 『승평지』,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