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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전남 동부지역 출신들로 보여진다. 이들과 김인배 사이에는 갈등요소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결속력이 강하였다고는 보기 어렵다. 10만명의 대규모 세력으로 알려진 영호도회소가 일시에 무너진 점에서 그러하다. 비록 과장된 숫자라고 하더라도 영호도회소에서 장악한 농민군 숫자는 상당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이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농민군을 열렬히 호응하였던 배경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민군을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의로운 군대라고 생각하여 지지하였다는 일본측 보고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324) 심지어 농민군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던 황현조차도 아래와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관군은) 행군을 하게 되면 연도에서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였고, 점포를 망가뜨리고 상인의 물건을 겁탈하는가 하면, 마을로 가득 몰려가니 닭이나 개가 남아나는 게 없었기에 백성들은 한결같이 이를 갈면서도 겁이 나 피했다. (중략) 적(농민군 ; 필자주)은 관군의 소행과는 반대로 하기에 힘써 백성들 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게끔 명령을 내려 조금도 이를 어기지 않으면서 쓰러진 보리를 일으켜 세우며 행군하였다. 이때 관군이나 도적들 양 진영은 모두 양식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민간 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하여 힘들게 옮겨와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적들의 진영에는 음식을 담은 광주 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관군은 굶주린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다.(『번역 오하기문』, 79∼80쪽) 민간에 대한 약탈은 관군이 주도한 반면, 농민군은 오히려 백성들의 폐를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썼다는 것이다. 하여, 농민군의 진영에는 백성들이 가져다 준 식량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당시 농민군들은 주로 관청의 건물을 파괴하고 문서와 장부를 불태우거나, 관청의 무기와 재물을 빼앗았으나, 일반 백성들에게는 기껏 먹을 것과 짚신을 요구할 뿐 부녀자나 재물을 약탈하지 않았다. 요컨대, 농민군은 자신들이 표방한대로 보국안민적 입장을 지키려고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농민군의 안민적 활동이 강화됨으로써 농민군의 숫자는 날이 갈수록 크게 늘어났다. 농민군에 한 번 들어오면 마치 별천지에 든 것처럼 여겼으며, 귀가하여 가래와 호미를 드는 일이나 가정을 돌보는 일은 내키지 않아 할 정도였다. 325) 영호도회소는 또한 각 군현의 치안 업무를 수행하였다. 수령과 향리들이 도망하거나 공무를 집행하지 않게 되자 일반행정뿐만 아니라 치안 기능마저 마비되었다. 이에 각 도소의 도집강과 도성찰, 각 면의 집강과 성찰 등을 중심으로 부랑배를 단속하거나, 타 지역의 농민군이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일을 막기도 하였다. 326) 324) 위의 책 3, 215쪽. 325)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 55쪽. 326) 김양식, 앞의 논문, 『호남문화연구』 23(1995), 6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