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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것이다. 영호도회소는 동부지역 각 군현의 농민군의 폐정개혁 활동을 지원하고, 전주의 대도소와 남원의 도회소로부터의 지시사항을 각 군현의 농민군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영남 서부지역으로의 진출 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모색하였으리라 짐작된다. 이제 전남 동부지역 농민군의 중심기관인 영호도회소의 조직은 어떠하였는지 알아보자. 각종 자료를 정리해보면 영호도회소의 조직은 매우 체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309) 즉, 영호도회소는 大接主 김인배가 통솔하였고, 그 아래에 首接主 劉夏德, 都執綱 鄭虞炯 李友會, 省察 權炳宅, 광양 순천 수접주 金鶴植 등이 상부 조직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상층부는 대접주 수접주 도집강 성찰 등으로 편제되었으며, 하층부에는 면단위마다 접주 접사 성찰 동몽 서기 등이 있었다. 310) 면과 면, 군과 군을 관할하는 도접주 혹은 수접주가 있었으며, 집강소를 따로 설치하지 않고 도회소가 집강소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311) 직책에 따른 임무를 대강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대접주와 수접주 및 도접주 등이 해당 도회소나 接을 관할하는 명실상부한 대표였을 것이며, 도집강은 해당 접의 폐정개혁을 수행하는 책임자로 믿어진다. 폐정개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의 전라좌우도 대도소의 도집강이 각 지역 도소나 도회소의 도집강에게 지시를 내리면 그러한 사안은 곧 邑面單位의 접으로 전달됨으로써 해당 집강들이 그것을 수행하였을 것이다. 영호도회소와 섬계역에 도집강이 존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그러하다. 즉, 전라좌우도 대도소 도집강(송희옥)-영호도회소 도집강(정우형)-각 읍면 집강 순으로 체계화되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영호도회소의 경우에도 대접주 아래에 도집강이 있는 점으로 보아 접주 아래에도 집강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 지역의 집강들은 해당 접주와 상의하여 농민군 보유 무기와 장비의 파악, 농민군의 약탈과 토색 금지, 민소 등을 해결하였으며, 그것을 다시 감영이나 도회소의 도집강에게 보고하였다. 312) 이러한 집강의 활동은 지방관의 임무에 비교될 정도였다. 313) 다시 말해 각 군현의 집강은 폐정개혁을 실행하는 주체로서 활약하였는데, 수 명의 실무진을 두고서 민간의 소장이나 폐정개혁의 추진뿐만 아니라 동학의 포교도 담당하였다. 314) 물론 동학의 6임 중의 하나인 집강의 소임은 포교조직과 관련하여 기율을 담당하였을 것이다. 한편, 接司는 접주의 명령을 받아 실행하는 부접주에 해당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省察은 치안이나 경찰 임무, 童蒙은 나이어린 청소년으로 심부름이나 호위를 주로 담당하였다. 315) 309) 「光陽縣捕捉東徒姓名成冊 順天府捕捉東徒姓名成冊 光陽蟾溪驛捕捉東徒姓名成冊」, 『雜冊綴』(규장각 소장 도서번호 21970) ; 김양식, 앞의 논문, 55쪽. 310) 김양식, 앞의 논문, 56쪽. 311) 위의 논문, 56∼57쪽. 312) 노용필, 「동학농민군의 집강소에 대한 일고찰」, 『역사학보』 133(1992), 103 117∼119쪽. 313) 황현, 『번역 오하기문』, 129쪽. 314) 오지영, 『동학사』, 473∼477쪽. 315) 김양식, 「1894년 농민군 都所의 조직」, 『史學志』 28(1995), 374∼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