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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1894년 음력 6월 25일(양 7.27)에 김개남은 휘하의 농민군 수만명을 지휘하여 전격적으로 남원을 점령하였다. 이미 전주화약이후 전라우도는 전봉준, 좌도는 김개남이 관할하고 있었다. 296) 따라서 김개남은 좌도의 요충지인 남원에 농민군을 집결시켜 자신의 세력을 과시하였다. 297) 전봉준은, 김개남이 남원을 점거하였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즉시 남원으로 달려왔다. 그는 김개남을 설득하였으나, 대중은 한 번 흩어지면 다시 모으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농민군의 해산을 거부하였다. 298) 당시의 국내외 정세에 대하여 전봉준과 김개남은 서로 인식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전남 동부출신의 농민군들도 대부분 귀향하였다. 그런데 농민군의 지도자는 전북 金溝 출신의 金仁培였다. 299) 그는 김개남을 지지하는 인물로서 전라좌도의 핵심적인 농민군 지도자였던 것 같다. 따라서 그는 좌도의 남쪽 요충지인 순천부를 점령하라는 김개남의 지시를 받고 순천으로 이동하였을 것이다. 당시 순천에 들어오는 과정에 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대개 이 (순천)부는 바다에 인접한 左道의 큰 도시이다. 작년(1894-저자주) 음력 6월이후 금구의 적 괴 김인배당이 각처의 비도를 이끌고 와서 10만명의 무리가 되었다. (김인배의 무리가) 와서 순천의 성 안에 웅거하고서 嶺湖都會所를 설치하였다(『동학란기록』 상, 680쪽).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김인배는 1894년 음력 6월 이후에야 순천에 들어왔다. 앞서 언급한 바 있던 백산 봉기에 참여한 순천 농민군보다 약 한 달 정도 늦게 들어온 셈이다. 그런데 김개남은 남원점령에 앞서 이미 음력 5월 하순부터 약 한달간 태인 순창 옥과 담양 창평 동복 낙안 순천 보성 곡성 등 주로 전라좌도 지역을 집중적으로 순행하였다. 300) 이 과정에서 김개남은 순천의 중요성을 파악한 후 1894년 음력 6월 말에 김인배로 하여금 순천을 점령케 하여 영호도회소를 설치한 것이다. 당시 순천부사는 공석 중이었으므로 김인배가 인솔한 농민군은 손쉽게 순천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런데 순천은 전봉준의 노선을 따르는 朴洛陽 등의 농민군이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라좌도는 김개남의 영향권에 있었으며, 그의 핵심인물인 김인배가 순천에 들어옴으로써 박낙양의 활동상이 전혀 드러나지 않다가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후에야 그의 행적을 찾을 수 있다. 즉, 그는 1904년에는 동학의 3대 교주 손병희가 주도한 共同傳授心法式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에는 천도교 宗務院 布德師로 활동하고 있다. 301)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기 때문에 同名異人일 296) 「甲午略歷」, 『동학란기록』 상, 65쪽. 297) 황현, 『번역 오하기문』, 227쪽. 298) 위의 책, 228쪽. 299) 김인배에 관한 대표적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이이화 우윤,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민혁명의 선두에 서다』(푸른역사, 2004). 300) 「영상일기」(『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2. 285쪽과 이진영, 「김개남과 동학농민전쟁」,『한국근현대사연구』 2(한울, 1995), 84쪽. 301) 오지영, 『동학사』(대광문화사, 1984 ; 1987), 213∼214쪽과 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