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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91 체포되었다. 음력 12월 22일(양 1.17) 보성출신의 安奎馥은 낙안의 수성군과 外西面 사람들에 의해 외서 突伊峙에서 붙잡혀 효수당한 후 그 頭骨을 좌수영으로 보내졌다. 290) 그는 湖左都接主 敦寧 執綱 등으로 불리며 수많은 농민군들을 거느리고 보성을 비롯한 인접 군현을 중심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이로 인해 본보기로 그를 軍民 앞에서 효수한 후 자른 머리를 좌수영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26일 보성군수는 일본군과 수성군이 협력하여 보성의 농민군 30여 명을 포살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291) 27일 보성의 수성군들은 낙안군 南上面 七洞(현 벌교읍 칠동리) 거주의 接司 崔煥九가 잠복한 卞禾里의 집에서 낙안의 유명한 농민군 지도자인 趙甫汝와 보성 농민군 지도자 崔德和를 체포했으나, 두 사람은 다음날 탈출하고 말았다. 292) 그 보복으로 80세가 다된 최덕화의 부친 崔得洙를 모진 고문 끝에 사경을 헤매게 했으며, 그의 집과 黃牛 2두, 벼 11석을 빼앗았다. 이와 같이 보성의 농민군 지도자 문장형 박태길 등은 1, 2차 봉기에 적극 가담했는데, 이들은 전봉준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그리고 안규복은 보성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박태길을 비롯한 보성의 농민군 지도부는 유원규 군수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서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또한 이들은 웅치를 비롯한 장흥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군사 활동을 전개하다가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보성에서는 접주급 지도자 약 10명이 희생되었으며, 일반 농민군 약 50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5. 전남 동부지역 농민군 활동과 피해 현황 1) 영호도회소의 집강소 활동 백산봉기이후 전라우도 지역에서 농민군의 항쟁이 한창일 때 전라병사 李文榮은 순천에서 150명, 광양 낙안 곡성 흥양 등에서 각 100명씩 砲軍을 선발하여 병영에 주둔시켜 농민군과의 전투에 대비한 적도 있었다. 293) 하지만, 전주화약 이후로는 각 군의 수령이 도망하거나, 농민군의 눈치를 살피며 향응을 베푸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농민군의 의도대로 邑政이 좌우되는 지역이 많았다. 294) 순천 역시 농민군의 영향력이 갈수록 높아진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서인지 金甲圭는 음력 6월에 이임하고 말았다. 295) 그리하여 새로이 부사가 오기까지 순천은 약 두 달간이나 수령이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290)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45쪽; 「선봉진정보첩」, 『동학란기록』 하, 245-246쪽. 291)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38쪽. 292) 위의 책, 669쪽. 293) 황현, 김종익 옮김, 『번역 오하기문』, 85쪽. 294) 「嶺上日記」, 『동학농민전쟁사료대계』 2, 285쪽. 295) 『昇平誌』(순천대 남도문화연구소, 1988), 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