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page

9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의 구금 과정에서 농민군 지도자들과도 어느 정도 교분을 쌓았을 것이다. 284) 그런데 보성의 농민군 지도자는 문장형을 비롯한 朴泰吉(일명 朴泰魯) 등이었을 것이다. 다음의 자료로써 그의 활동을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다. 寶城賊 朴泰老(박태길-저자주)는 琫準의 선봉이 되어 전주를 함락시키고 보성으로 돌아와 遠奎를 섬 겼는데, 예의에 벗어남이 없었으므로 원규는 그를 덕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관군이 태로를 체포함에 이르러 원규는 태로를 칭찬하는 말을 하였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319쪽). 위의 내용으로써 박태길은 1차 봉기시 전주성 점령에 참여한 후 귀향하여 보성군수와 우호적인 관계하에 집강소의 폐정개혁을 추진한 것으로 보인다. 박태길은 1894년 말경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로 석방되었다. 285)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보성군수 유원규를 비롯한 이방언 김낙철 등과 같이 풀려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전라도관찰사 이도재의 명령으로 다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한편, 음력 7월 중순 보성의 농민군 수백명은 장흥으로 진출하리라는 소문이 떠돌자, 강진 병영에서 군대를 소집하여 대비하였다. 286) 이는 보성과 장흥의 농민군이 서로 연계되었음을 의미할 것이다. 2차 봉기이후 동원령이 내리자 보성에서는 文章衡의 주도로 3천명을 불러모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87) 하지만 이들의 북상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보성의 경계인 웅치는 당시 장흥 관할이었는데, 주로 웅치를 중심으로 농민군의 활동이 포착된다. 당시 웅치의 농민군 지도자는 具敎澈이었는데 음력 10월말부터 보성 광주 남평 금구 능주의 농민군과 연합하여 장흥 점령을 모색하고 있었다. 288) 이들은 장흥의 연합 농민군으로 활동하며 벽사역 장흥읍성 강진읍성 병영성 등을 차례로 점령하며 기세를 올렸다.하지만 음력 12월 15일 장흥 석대들 전투의 패배를 고비로 수성군의 집요한 추적에 직면하였다. 결국 보성의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289) 즉, 1895년 1월 10일(음 12.15) 보성 鳥峙에서 보성의 농민군 9명의 포살을 시작으로 다음날에는 11명이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8일에는 보성 농민군 지도자 梁成佐 許成甫 許用範 등이 장흥의 농민군 지도자 金寶烈 金成漢 鄭德欽 金時彦 具子益 등과 같이 체포되어 다음날 효수되었다. 19일 朴允之 金達每 등도 軍陣 앞에서 처형되었으며, 순천의 都省察 孫作亂은 보성읍 牛山의 高田山 토굴에 숨어 있다가 284) 이러한 인연으로 이방언은 보성군수의 도움을 받아 보성 會寧(현 회천면)에서 은거하다 붙잡혀 처형되었을 것이다. 285) 「朴泰吉判決宣告書」, 『東學關聯判決文集』(정부기록보존소, 1994), 42쪽. 이 판결문에 의하면 그는 보성 출신으로 45세의 나이였는데,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이었다. 그런데 전봉준 손화중 최경선 등의 판결문에도 모두 농업에 종사하는 평민으 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박태길 역시 농촌의 지식인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286) 박기현, 『일사』, 「1894년 7월 18일자」. 287) 오지영, 『동학사』, 483쪽. 288)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50-452쪽. 289)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