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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89 梁氏阿時가 체포되어 강진 병영으로 압송되었다. 280) 이 가운데 최영기는 유명한 농민군 지도자여서 영암에서는 수개월동안 체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끝에 붙잡았다고 한다. 양씨아시 역시 농민군 지도자로서 활동 내용을 철저히 조사하여 반드시 처벌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와 같이 영암은 약 10명의 농민군 지도자가 붙잡혀 처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영암은 동학 교세와 농민군 조직이 다소 미약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암의 경우 군서면 구림의 會社亭, 덕진면 영보리의 永保亭, 영암읍 장암리의 場岩亭을 중심으로 한 대동계가 강하게 존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향촌질서가 동학의 수용과 농민군 활동을 전개하는데 제약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믿어진다. 더욱이 바로 인근에는 나주목이 농민군의 공세를 끝까지 막아내며 버틴 점도 일정한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암 농민군의 활동은 미약한 수준이었을 것이고, 그에 따른 피해도 크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장흥과 인접한 보성의 농민군 활동을 알아보기로 하자. 집강소 활동기 보성군수 柳遠奎는 농민군의 활동에 우호적이었던 것 같다. 당시 그는 백성들의 곤궁을 구제하고 농민군을 잘 막아내어 고을 전체를 안정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보성군수에 재임명되었다. 281) 그는 1895년 1월경 농민군 진압과정에서 농민군을 도왔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서울까지 압송되었다가 1895년 음력 3월 21일 이방언 등과 같이 무죄로 석방되었다. 그는 보성군수로 부임하던 중 공주에서 만난 김방서 이방언 김낙철 등에게 혹시라도 고향의 상황이 불리하면 보성으로 자신을 찾아오라는 호의를 베풀었다. 282) 실제로 보성군수 유원규는 함평현감과 같이 농민군 연루 혐의로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다. 다음의 기록을 주목해보자. 咸平과 寶城의 縣令은 東學黨이며, 관군이 도착했는데도 관군을 위해 조금도 도움을 주지 않았고 포 박되어 협박을 받고서야 비로소 스스로 나와 군대를 끌고 올 정도의 徒輩들이므로, 그 부하도 말할 것 없이 모두 東學黨이었다. 이 두 縣令을 체포하여 政府에 인도하였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4 쪽). 당시 일본군은 보성과 함평의 수령을 동학당이라 규정하여 체포한 후 정부에 인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전후한 시기에 보성군수는 나주의 관군을 지휘하며 잠복한 농민군 지도자의 정찰과 체 포에 기여하였다. 283) 이로써 일본군은 그를 ‘의심할 바 없는 행동을 보인’ 것으로 판단하여 어느 정도 혐의를 벗은 것 같다. 이러한 점들을 참작하여 정부에서는 그를 석방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그는 서울 280)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34쪽 ; 「선봉진정보첩」, 앞의 책 하, 253-254쪽. 281) 『일성록』 고종 31년 갑오 9월 17일. 282) 김낙철, 『김낙철역사』, 「을미 정월 초6일」. 283)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1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