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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결국 기울어진 대세를 회복하지 못한 채 각자의 살 길을 찾아 해산하고 말았다. 이들은 인근의 천관산이나 바다를 건너 섬으로 피신하였다. 하지만 관군과 수성군의 엄밀한 수색에 걸려 장흥 장대와 벽사역 뒤에서 수십명씩 처형된 것으로 전해진다. 장흥의 연합 농민군을 이끌었던 이방언 역시 체포되어 나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아 무죄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그는 보성에 은거중 다시 체포되어 음력 4월 27일 벽사역에서 아들과 함께 처형당했다. 이듬해 1월 13일에는 고읍접주였던 김학삼(화삼)이하 14명이 체포되어 벽사역에서 포살되었고, 21일 대흥접주 이인환은 천관산에 피신했다가 붙잡혀 나주로 압송되었다가 음력 3월 그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이사경 역시 1월 15일 벽사역에서 포살되었으며, 김방서는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나 다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이 외에도 얼마나 많은 농민군들이 희생되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이와 같이 장흥 강진의 농민군은 집강소 이후에도 동학교단 조직을 기반삼아 폐정개혁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이들은 새로운 희망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다 2차 봉기의 동원령에 기꺼이 응하였다. 지방통치의 공백기를 활용하던 이들은 다시 기존의 체제를 수호하려던 수성군 세력과 정면으로 대응하였다. 특히, 일본이 추진한 섬멸작전의 최종 승부처였던 석대들 전투에서 최소한 1천명 이상의 희생자가 발생함으로써 가장 큰 피해지역으로 각인되었다. 석대들 전투는 장흥의 농민군이 주도하였으나 금구접을 비롯한 강진 광주 능주 등의 농민군과 합세한 연합 농민군의 항전이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76) · 한편, 해남과 강진 사이에 위치한 영암의 농민군 활동은 어떠했을까. 영암은 집강소 이후의 활동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음력 11월 초순에야 영암의 농민군 활동이 감지되지만, 277) 그것 역시 나주에서 진압군을 출동시키자 형적을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영암에 출현한 농민군이 영암을 무대로 활동했는지 조차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강진지역에서 활동한 농민군이 영암을 엿보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장흥 농민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 농민군들이 장흥과 강진을 점령한 다음 영암으로 진격할 움직임을 보인 점 278) 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장흥의 연합 농민군들은 남하하는 진압군의 공세를 우려하여 영암 점령을 미루고 장흥으로 회군하였다. 하지만 영암에서도 자체적인 농민군의 활동이 없지는 않았다. 그들이 수성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된 것으로 보아 그러하다. 영암에서는 ‘東徒魁首’라 지칭된 朱成彬 姜君五 金順凡 鄭用達 金順天 金權西 朴孟用 등 7명이 붙잡혀 포살당했다. 279) 음력 12월 28일에는 농민군 지도자 崔永奇 276) 장흥과 강진의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주요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다. 『康津과 東學』(강진문헌연구회, 2000). 『장흥동학농 민혁명사료총서』 Ⅰ Ⅱ(위의환 역, 천도교장흥교구 장흥군, 2009) 『全羅道 長興地域 東學農民革命 史料集』(전라남도 장흥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0). 위의환, 『장흥동학농민혁명과 그 지도자들』(장흥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13) 277) 이병수, 『금성정의록』 갑편(나주목향토문화연구회, 1991), 65쪽 . 278) 위의 책, 76-77쪽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1쪽. 279) 「선봉진정보첩」, 『동학란기록』 하, 236-2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