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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혁명 87 동학교인으로 아리따운 젊은 여성이 말을 타고 장흥부 공격을 앞장서서 지휘했다는 것이다. 마치 프랑스의 잔 다르크가 연상된다. 이씨 부인인 이 여성은 ‘신이부인’ 혹은 ‘신녀’라고 불리는 점으로 보아 巫女일 가능성이 짙다. 이 여성은 동학교인의 존경을 받으며 죽음을 무릅쓰고 장흥성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씨 부인은 招募官 白樂中 273) 에 의해 붙잡혀 수성군의 모진 고문으로 양쪽 허벅지의 살이 모두 문드러지고 썩어서 악취가 진동하였다. 그녀는 죽은 송장이나 다름없이 나주의 감옥에 방치되어 있던 중 일본군의 치료를 받았는데, 그 후의 상황은 알 수 없으나 일본군은 그녀를 ‘정신 착란자’로 간주하였다. 274) 그리고 장흥의 농민군들은 16-17세 가량의 崔童子란 소년을 신처럼 존숭했다고 한다. 그 역시 노새를 타고 농민군을 지휘하다 장흥에서 총상을 입고 나주로 압송되어 사경을 헤매다 일본군의 치료를 받아 살아났다고 하나, 275) 생사 여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한편, 장흥의 소식은 초토영이 있는 나주에도 전해졌다. 강진과 장흥이 농민군의 수중에 장악되자, 관군과 일본군은 세 방향으로 압박하여왔다. 이두황군은 순천에서, 이규태군은 영암에서, 일본군은 나주에서 이동해온 것이다. 이에 대응하여 장흥의 연합 농민군은 장흥읍 남문 외곽과 건산 모정등에 병력을 배치하였다. 이들은 음력 12월 12일 관군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 농민군은 관군의 신식 무기의 위력에 20여 명의 전사자를 내고 퇴각하였다. 전열을 재정비한 농민군은 이방언과 이인환의 지휘 하에 최후의 결전을 치렀다. 15일 이들은 장흥의 석대들에서 경군과 일본군과의 대회전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아래와 같다. 금월 15일 장흥읍에 도착하여 읍의 상황을 탐문하였다. (중략) 뜻밖에 匪類 3만명이 高峰 아래로부터 북쪽 後麓 主峰까지 산과 들 가득히 수십리에 뻗혀 봉우리마다 나무 사이로 기를 꼿고 함성을 질러 서로 호응하며 포를 쏘아대며 날뛰어 창궐하니 그 세력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내 백성들은 창황히 도 망하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일본군 중위와 상의한 뒤 통위영 병정 30명으로 후록 주 봉의 적을 막게 하고 본대 병정과 日兵은 장흥성 모퉁이 대나무 숲 아래 숨게 하고 먼저 民兵 30명을 헤아려 내보내 평원뒤로 유인하게 하였다. 사졸들이 분발하여 총을 들고 양로로 나누어 진격하여 죽 늘어서서 대열을 벌이며 진격하면서 접전하여 수 백명을 砲殺하였다(「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 록』 상, 622-623쪽). 농민군 3만명이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관군의 유인전술에 말려들어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후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관산읍 옥산리에서 싸우다 1백여 명이 죽고 273) 백낙중은 운봉의 幼學으로 운봉 수성의 공로를 인정받아 초모관으로 임명되어 농민군 진압활동을 전개한 인물이다(朴周 大, 『羅巖隨錄』, 「甲午十月」). 274)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3쪽. 275) 위와 같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