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page

동학혁명 83 石峴里 출신이었다. 258) 1894년 음력 7월이후 손행권은 김수종을 동학에 입교시켜 함께 농민군 활동을 농민군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니까 집강소 시기에 이들이 동학에 입도하여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더욱이 당시에는 수령이 부임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농민군의 활동이 용이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비슷한 시기에 조도면 朴仲辰은 영광 무장 등지에서 농민군을 앞장서 들여와 무기와 전곡의 징발을 빙자하여 도리어 민폐를 끼쳤다. 이로 인해 수성군이 쉽게 편성되어 손행권 등을 붙잡고, 박중진은 체포될 위기에서 自盡하였다. 이들을 포함하여 진도에서 희생된 농민군의 규모는 70-80명 정도였다고 한다. 259) 그런데 수성장을 맡은 曺龍奇는 수성군의 비용을 충당한다고 빙자하여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거나 관곡과 민재를 불문하고 착복한 죄목으로 구속되었다. 260) 수성군 역시 적지 않은 폐단을 야기했기 때문이므로, 진도의 監牧官은 조용기의 선처를 요청하였다. 이때 감목관은 진도의 상황에 대해 ‘관은 관이 아니고 벼슬아치는 벼슬아치가 아니었다’고 하며 오로지 동학과 농민군만의 세상이었다고 보고하였다. 집강소 시기이후 진도의 농민군 세력이 매우 강력했음을 알 수 있다. 진도의 농민군 진압에 앞장섰던 일본 측의 다음과 같은 기록을 통해 그러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髑髏. 명치 39년(1906-저자주) 9월 20일 진도에서. 右는 명치 27년(1894-저자주) 한국 동학당이 궐기하였다. 전라남도 진도는 그들이 가장 극심하게 창궐한 곳이었다. 그들을 평정하고 돌아올 때 그 首唱者 수백명을 살해하여 시체가 길가에 널려 있었다. 수창자는 효수되었으며, 右는 그 중 하나이 다. 해도를 시찰할 때 採集한 것이다. 佐藤政太郞(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41쪽에서 재인 용). 진도의 농민군이 대단히 강력하였으며, 그 중 수백명이 희생되었을 뿐만 아니라 효수된 농민군의 유골을 일본인 사토가 ‘채집’했다는 것이다. 일본인 사토는 1906년 당시 목포에 거주했는데, 일본인 목화농장의 감독관으로 일하던 중 유골을 ‘채집’하여 北海島大學으로 보낸 것이다. 그런데 홋카이도대학 古河講堂의 종이상자에 보관되어 있던 유골 6점이 1995년 7월에 발견되었는데, 그중 한 두개골에 위의 문서가 들어 있었다. 261) 일제강점기 홋카이도대학은 일본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주변 국가의 여러 민족의 유골을 수집, 비교 연구를 수행하는 기관이었다. 다시 말해 제국주의 국가들의 약소국가 침략을 정당화하는 인종주의이론을 연구하는데 주변 국가의 유골을 불법적으로 반출하여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독일의 히틀러가 인종차별을 정당화하기 위해 게르만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운 것과 비슷한 사례인 것이다. 258)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15-616쪽. 259) 「진도종리원연혁」, 『천도교회월보』 261, 1932년 11월호. 260) 위의 책, 615-617쪽. 261)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2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