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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같은 날 해남의 농민군 지도자 백장안도 붙잡혀 나주로 압송되었다. 252) 29일 현산면의 수성군은 접사 장극서, 교수 李重鎬, 도집 林濟煥, 집강 崔元圭를 체포, 심문하였다. 253) 이 가운데 백장안은 삼산면 구림 출신으로 1888년 무과에 급제한 인물로 흔히 ‘백선달’로 불려졌다. 그는 음력 12월 16일 해남의 농민군을 이끌고 우수영을 공격한 바 있었는데, 25일 祿山面 수성군에 의해 완도 불목리에서 체포되어 해남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254) 한편, 해남에 주둔하던 관군과 일본군은 농민군 진압을 빙자하여 수많은 민폐를 야기하였다. 이들의 요구로 해남 지역민들은 약 한달 동안 주둔하며 전곡, 소와 사료, 담배 등 온갖 수탈에 시달렸다. 255) 특히, 관군이 야기하는 폐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심지어 일본군조차 “統衛兵 대장(좌선봉장 李圭泰-저자주)은 전날 말한 것과 같이 조금도 바람직하지 않다. (중략) 그는 해남현에서 현령과 민간인을 강탈하여 금전을 강탈하였다. (중략) 그가 금전을 겁탈한 곳은 오로지 이곳 해남뿐만 아닌 것 같다”고 할 정도였다. 관군의 지휘관이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그 부하들의 약탈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은 음식 담배 버선 내의 금전 등을 주로 빼앗았다. 256) 이와 같이 해남은 비교적 집강소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하였는데, 그래서인지 농민군 지도부가 상당히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이들은 또한 무안 진도 강진과 연계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해남 농민군의 규모와 소요 비용, 비용의 분담 주체를 알 수 있는 자료의 발굴을 통해 구체적인 내역을 살필 수 있었던 점도 주목된다. 특히, 이 지역은 일본군의 섬멸전술로 인해 혹심한 피해를 당했는데, 농민군 약 250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제 해남과 연계된 진도의 농민군 활동을 알아보기로 하자. 1894년 음력 9월 재봉기이후 농민군은 기세좋게 북상하였다. 하지만 공주에서 일격을 당한 후 패퇴를 거듭하였다. 관군을 앞세운 일본군은 전라도를 압박하여 쥘부채의 손잡이에 해당하는 해남까지 압박하였다. 진도는 쥘부채에 달린 자수노리개에 해당하지 않을까 한다. 해남과는 불가분의 脣齒 관계였던 것이다. 당시 진도는 무안 해남 강진 등지에서 내려온 농민군과 합세하여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력 12월에 이르러 시시각각 형세가 불리한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더욱이 일본군과 경군이 같은 달 26일 碧波津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진도읍은 술렁거렸다. 곧바로 조직된 수성군은 동요하는 농민군 지도부를 급습하여 孫行權 金秀宗을 시작으로 7명을 붙잡았다. 257) 다음날 진도읍에 들어온 경군은 체포된 농민군을 취조한 후 손행권 등 4명을 처형하고, 나머지는 석방한 후 군량을 조달하여 우수영으로 돌아갔다. 손행권은 郡內面 內洞里 출신이며, 김수종은 같은 면 252) 위의 책, 648쪽. 253) 위의 책, 643-644쪽. 254) 박찬승, 앞의 책, 147쪽 ; 이상식 외,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77쪽. 255) 「선봉진정보첩」, 『동학란기록』 하, 249쪽. 256) 『주한일본공사관기록』 6, 56쪽. 257) 「先鋒陣呈報牒」, 『동학란기록』 하, 2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