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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구례의 농민군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이후에 살아남은 농민군은 누구이며 무엇을 하였는지 알아보자. 1892년 곡성의 기봉진으로부터 동학을 수용한 허탁과 임양순 우공정 등은 농민혁명 과정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1900년 후반에 천도교 교역자로 활동하고 있다. 예컨대, 허탁은 1907년부터 9년까지, 임양순은 1910년까지, 우공정은 1911년까지 구례군 산동면 傳敎師로 활동하였다. 이들이 산동면에서 활동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은 구례군 산동면 출신이었던 것 같다. 그 후 허탁은 1910년과 16년에 구례군 교구장을 역임하였으며, 우공정은 1910년에 共宣員을 지내는 등 구례지역의 대표적인 천도교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1894년 농민군을 지도하였던 동학접주들은 살아남은 이후에도 천도교 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일반 농민군들의 경우에는 그저 前歷을 숨기고 변성명해가며 오로지 생존하기 위한 힘든 역정을 거쳐 왔으리라 믿어진다. 4. 전남 남부-연해지역 농민군 활동과 피해 현황 음력 6월 중순이후 해남에도 농민군들이 귀향하기 시작하였다. 전주화약으로부터 약 한달 정도 지나면서 적을 때는 20여 명의 농민군이, 많을 때는 2천여 명이 해남읍에 들어 온 것이다. 그러한 그들이 들어올 때의 광경은 아래와 같다. 들어오는 농민군들은 각각 창이나 총검을 들고 포를 쏘며 입성하여 그 위세가 늠름하였다. 백성들이 소란스럽게 움직여 음식을 대접하는데 읍내의 각 민가와 시장 주위의 술집 등에 나누어 대접하였다 (「道人經過來歷」,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68쪽). 무장한 농민군들이 늠름한 위세를 자랑하며 해남읍에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음력 6월 12일부터 약 한달여 동안 모두 4,700여 명이 해남읍을 지나갔다. 245) 「도인경과내력」 에서는 농민군을 ‘東學’ 혹은 ‘道人’으로 지칭하였는데, 이들의 규모와 주둔시 소요 비용, 그리고 비용의 부담 주체 등이 기록되어 있다. 약 5천명의 농민군이 약 1개월 동안 해남에 머무를 때 발생한 비용은 6천여 냥 정도였는데, 그 비용의 2/3가량을 尹兵使 댁에서 조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나머지는 관아에서 1천냥과 각 면의 요호로부터 전 현직 관료, 이속, 심지어 退妓도 분담하였다. 그런데 조달한 금액을 모두 자신들이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20% 정도의 금액을 가난한 민간인과 노비들에게 지급하기도 하였다. 이는, 폐정개혁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총기와 화약 등 무기류를 징발하였다. 이를 통해 집강소 시기에 농민군이 사용한 비용의 파악과 비용의 부담 주체, 활동 내용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되는 자료라 하겠다. 245) 「道人經過來歷」(황토현기념관 소장) ; 『전남동학농민혁명사』, 468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