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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 연구 장악하였다. 234) 그 결과, 그는 민포군을 모집하여 성을 지키고, 농민군을 체포한 공로를 인정받아 훗날 군공록에 올랐다. 235) 당시 구례의 수성군 편에 가담한 주요 구성원으로는 맹주 이기를 비롯하여 유학 王師春 朴海友, 전 都事 金弘植, 전 현령 南宮杓, 진사 金龍善, 전 監役 朴健陽, 유학 유제양 朴泰鉉, 左軍 金淇文, 後軍 安昌燮, 前軍 高昌寔, 義兵中軍 高熺洙, 이방 安冀燮, 호장 金在炫, 좌수 全斗景, 진사 高光文, 右軍 尹滋恪, 집사 金履浩 金光璧, 서기 尹相浩 金光斗 權東旭 등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이기는 농민들이 백산에서 봉기하자, 전봉준을 찾아가 서울로 쳐들어가 간신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하자고 제안했던 인물이다. 236) 그의 말에 솔깃한 전봉준은 김개남을 찾아가 같은 내용을 말해보라고 하였다. 김개남을 찾아 남원에 간 이기는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김개남이 그를 믿지 못하고 해치려 하였기 때문이다. 위기를 겨우 모면한 이기는 구례로 도망하여 이 때에 이르러 수성군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다. 또한 유제양은 운조루의 주인으로 『是言』(1851∼1922)이란 생활일기를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매천 황현에 의하면, 남궁표는 농민군에 적극 협조하고 동학을 신봉하였는데, 수성군에 참여하고 있음도 주목된다. 남궁표는, 유제양이 자신의 일기에서 언급한 농민군에서 변신한 인물로 보여진다. 이들은 대체로 구례의 토호세력으로서 전직 관리와 양반 유생 그리고 향리들이었다. 이들은 민포를 조직하여 읍성을 방어하는 한편, 농민군 지도자나 접주 및 일반 농민군을 체포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본격적인 활동이 전개됨으로써 농민군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1895년 음력 1월 9일 구례에는 壯衛營 副領官 李斗璜이 인솔하는 800여 명의 영병들이 들이닥쳤다. 237) 이두황의 장위영군은 가는 곳마다 농민군 진압을 명분삼아 갖가지 나쁜 짓을 자행하였다. 이두황이 구례에 왔을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두황은 전라지방에 들어온 뒤로 전투에서 별다른 공도 세우지 못한 채 가는 곳마다 기생을 끼고 질탕 하게 술을 마시며 강제로 재물을 빼앗아 가득가득 쌓아두었다. 그가 구례를 출발할 때 이러한 재물 꾸러미를 실은 소와 말이 사오십 마리나 되었으므로 군사들이 사납게 흘겨보았지만 그런 짓을 멈추 게 하지는 못했다. 군읍에서 적을 묶어 진에다 보내면 이따금 풀어주기도 하여 백성들이 매우 한스러 워하였다. 매번 적을 사로잡고 두황이 온다는 소문이 들리면 바로 죽여 버렸는데 두황은 또 그 마음 대로 죽인 것을 허물하였다. 이 때문에 백성들은 크게 실망하였다(황현, 『번역 오하기문』, 303쪽)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두황은 기생이나 끼고 다니며 재물을 탐하는 전형적인 탐관오리에 지나지 234) 「先鋒陣呈報牒」, 『동학란기록』 하, 225∼229쪽 235) 「동학당정토인록」·「갑오군공록」, 『동학란기록』 하, 623 720쪽. 236) 이기, 『해학유서』, 9쪽. 237)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란기록』 상, 655 657쪽.